아이즈 프리! 스마트폰, 내 시선을 해방시켜줘

시리와 아이즈 프리

6월11일(현지시간) 개막한 WWDC 2012에서 애플은 새 iOS6를 공개하면서 음성인식 솔루션인 시리(Siri)의 기능을 대폭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어 지원이 곧 추가될 것이라는 소식이 반갑습니다. 발표 직후 공개된 iOS 6 베타1에는 이미 한국어판 시리가 추가돼 많은 개발자들과 얼리어답터들이 설치해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어에서는 부족한 점도 많이 엿보이지만, 한국인 개발자와 얼리어답터들의 참여로 정식 출시 때까지 많은 학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리는 여러 면에서 다른 음성인식 솔루션과 비교해 한 단계 진일보한 솔루션입니다. 정해진 명령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어를 인식할 수 있고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울프람 알파나 옐프(Yelp), 오픈테이블, 로튼 토마토, IMDB 등 다양한 서비스와 제휴해 영화, 식당, 스포츠, 영화 등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음성만으로 쉽게 검색해주고 직접 예약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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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12개월 이내에 시리에 한국어를 추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iOS6 베타에 한국어 시리가 포함돼 9월 iOS6 정식 출시 때 함께 공개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시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입’과 ‘귀’와 ‘눈’이 유기적으로 통합돼 있다는 것입니다. 시리 이전에 있었던 대부분의 음성 관련 솔루션은 음성 명령과 음성 검색, 받아쓰기(Speech-to-Text), 읽어주기(Text-to-Speech) 등 여러 기능이 각자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형태였습니다. 음성 명령은 음성 명령 기능에서, 음성 검색은 검색 앱이나 위젯에서, 받아쓰기는 문자나 메일 앱에서 키보드를 불러내서, 읽어주기는 TTS 기능을 제공하는 별도의 앱을 실행시켜야 쓸 수 있었습니다.

시리는 이러한 모든 기능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이용자는 음성 명령 기능이나 문자메시지함, 메일함,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별도로 실행시킬 필요 없이 시리만 불러내면 됩니다. 시리는 이용자의 명령을 판단해 적절한 기능을 실행하고 그 결과를 말과 글, 표 등 적절한 형태로 보여줍니다. 애플이 시리를 음성인식이나 음성명령 솔루션이라고 부르지 않고 지능형 개인 비서(intelligent personal assistant)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시리를 이용할 때에도 복잡한 기능을 쓰기 위해서는 화면을 직접 보는 것이 좋지만, 간단한 기능은 스마트폰 화면을 보지 않고도 아이폰을 귀에 대거나, 이어폰이나 핸즈프리 헤드셋의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화를 걸고 음악을 재생하는 등 기본적인 기능은 물론,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페이스북, 트위터에 글을 올리거나, 새로운 일정을 캘린더에 등록하거나 스포츠 경기 결과를 확인하는 등 많은 작업을 아이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고도 몇 마디 말로 대신할 수 있고 그 결과도 간단히 음성으로 안내 받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음성관련 솔루션이 시리와 같은 형태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미 삼성전자는 갤럭시S3부터 탑재되는 S보이스에서 시리와 유사한 기능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글이 개발하고 있다는 구글 어시스턴트도 기존의 보이스 액션이나 음성 검색, 음성 받아쓰기 기능을 하나로 통합한 지능형 솔루션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 면에서 스콧 포스톨 iOS 담당 수석부사장이 이번 기조연설에서 ‘아이즈 프리(Eyes Free)’라는 신조어를 들고 나온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핸즈 프리가 전화통화에서 우리의 손을 해방시켜줬다면, 아이즈 프리를 통해 이동 중에 우리의 눈까지 해방시켜주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IT 업계에서는 N스크린 경쟁이 한창이죠.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스크린을 이용하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가 24시간 내내 스크린을 끼고 살 수 있을까요? 스마트 기기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스크린을 볼 수 없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N스크린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한 켠에는 이미 시리를 필두로 한 ‘No-스크린’ 혹은 ‘아이즈 프리’ 경쟁이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20611 apple eyes free스콧 포스톨 애플 수석부사장이 Eyes Free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애플 키노트 영상 캡쳐)

N-스크린이 대세? No-스크린도 있다!

길을 걷다보면, 걸어가면서 스마트폰 화면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SNS 등 걸어가면서도 스마트폰으로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걸어가면서 스마트폰을 쓰기에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흔들리는 화면을 붙잡고 작은 터치스크린을 두드려 글을 입력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오타도 많이 납니다. 걸어가면서 스마트폰으로 지도라도 검색하려고 하면 차라리 발길을 멈추는 편이 속 편합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안전입니다. 시선을 작은 스크린에 빼앗기는 동안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동 중에도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길을 걷다가 전봇대와 조우하거나 골목길에서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디거나, 횡단보도에서 스마트폰을 보다가 옆 사람이 움직이자 혼자 파란불인 줄 알고 걸어가는 경험을 했다면 벌써 중증입니다.

운전 중에는 더욱 위험합니다. 최근 한국도로공사 충청사업본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충청권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512건의 교통사고 가운데 전방 주시태만으로 발생한 사고가 28%(146건)에 달했습니다. 졸음운전(20%)이나 과속(18.2%)보다 많은 수치입니다. 전방 주시태만이 모두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내비게이션에 탑재된 DMB와 더불어 최근 급속히 보급된 스마트폰이 차량 내부에서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주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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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폰7 광고 중. 그러나 메트로UI도 우리를 스크린에서 해방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비자들이 이동 중에 스마트폰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2011년 하반기 스마트폰 이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스마트폰 이용자의 58.3%가 “차량 이동 중에 스마트폰을 이용한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이 수치에는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 등 직접 운전을 하지 않는 경우도 포함돼 있겠지만, 이용자들이 이동 중에도 스마트폰을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설령 이용자들이 가급적 운전 중이나 걷는 중에 스마트폰 이용을 자제하려고 노력한다고 할 지라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메시지는 물론, 카카오톡 알림과 각종 푸시 알림 등 다양한 정보가 날아와 이용자의 주의를 분산시킬 것입니다. 핸즈 프리에 이어 아이즈 프리 혹은 No-스크린 기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런 면에서 애플이 직접 자동차 회사와 제휴해 시리를 자동차에 통합하고 시리를 호출하는 버튼을 자동차에 내장하기로 한 것은 참으로 발 빠른 행보입니다. 무엇보다 벤츠와 BMW, GM, 토요타 등 9개에 달하는 자동차 브랜드를 동시에 끌어들였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IT 기업들이 한두 개 자동차 회사와 제휴해 차량용 텔레매틱스나 인포테인먼트 기능을 개발해왔지만, 애플은 시리를 통해 단번에 이 시장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이용자를 붙잡아둬야 하는 스마트폰 제조사나 서비스 제공자로서도 이동 시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출퇴근이나 등하교 시간, 일과 중에 이동하는 시간을 모두 포함하면 우리가 하루 중에 이동하는데 소비하는 시간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2010년 국가정보전략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근로자가 하루 출퇴근에 소비하는 시간이 평균 152분이나 된다고 합니다.

과거에 이 시간은 주로 라디오의 차지였습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보급에 힘입어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와 오디오 팟캐스트 등이 이 시간을 파고 들고 있습니다. 시리를 필두로 한 다양한 음성 솔루션이 등장함에 따라 앞으로는 더 많은 서비스가 이동 중에도 우리를 편리하게 찾아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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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 연결 버튼을 기본 탑재한 자동차가 BMW 등 9개 사에서 출시될 예정이다

구글 안경은 시리의 경쟁자?

지난 4월 구글이 개발 중인 스마트 안경인 ‘프로젝트 글래스’가 공개돼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뜬금 없이 구글 안경 얘기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동 중에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 기기라는 측면에서 구글 안경은 시리 등 음성 어시스턴트 서비스와 경쟁하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플 시리나 구글 어시스턴트 등 음성 솔루션이 No-스크린이라는 관점에서 이동 중인 이용자를 공략한다면, 구글 안경은 한층 휴대성이 뛰어난 새로운 스크린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제공하겠다는 관점입니다.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는 2013년에 구글 안경을 상용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요, 단기적으로는 구글 안경처럼 새로운 스크린을 제공하는 기술보다는 시리와 같은 음성 어시스턴트 솔루션이 훨씬 확산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휴대폰은 모두가 휴대하는 기기이지만, 안경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안경을 벗으려고 목돈을 들여 라식 수술도 하는 마당에, 걸어가면서 지도를 보고 SNS를 이용하려고 소비자들이 다시 안경을 쓰게 될 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물론 저처럼 이미 안경을 쓰고 있고 이동 중에 정보에 대한 욕구가 큰 분들이라면 구글 안경은 환영할 만한 제품일 것입니다. 시각이 청각보다 훨씬 풍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면에서 장기적으로는 기존 안경 시장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음성 어시스턴트는 대중적인 기술로, 스마트 안경은 보완재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해 봅니다.

google_project_glasses_1_500한 미국 TV 쇼에서 구글 안경이 소개되고 있다

아이즈 프리, 모바일 접근성 개선의 돌파구

시리 등 음성 어시스턴트 기술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시각장애인용 접근성 향상 프로젝트는 항상 스크린을 염두에 두고 진행됐습니다. PC 모니터에서 마우스를 움직이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했을 때 해당하는 아이콘이나 메뉴가 무엇인지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방식입니다. iOS 보이스 오버나 안드로이드 토크백 기능이 대표적입니다. 시각장애인도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기술이지만, 일일이 화면을 터치해가며 원하는 기능과 메뉴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여전히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반면 최근 등장한 시리와 같은 음성 어시스턴트 기술은 굳이 이용자가 스마트폰 화면을 꾹꾹 눌러 읽어달라고 할 필요가 없이 시리를 불러내 말만 하면 알아서 실행하고 대답을 찾아줍니다. 음성 어시스턴트 기술이 발전하면 더 이상 보이스 오버와 같은 별도의 시각장애인용 접근성 기능이 필요 없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흡수 통합된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사실 ‘아이즈 프리’라는 용어는 애플이 원조가 아닙니다. 애널리스트들이 관련 기술에 대해 붙인 이름이죠. T. V. 라만 박사가 이끌고 있는 구글의 시각 장애인용 모바일 접근성 향상 프로젝트의 명칭도 ‘아이즈-프리’ 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최신 음성 어시스턴트 기능의 상당 부분은 사실 시각 장애인용 접근성 향상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아이즈 프리 기술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모두 이롭게 하는 고마운 기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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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모바일 접근성 기능은 화면을 읽어주는 기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음성 솔루션의 한계와 미래

아직 아이즈 프리 분야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은 기술입니다. 한 발 앞서 있다는 시리만 해도 아직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보다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더 많습니다. 특히 국내에서 시리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인식 기능을 더욱 보강하고, 위치정보와 맛집, 극장, 스포츠 DB 등 다양한 로컬 정보를 통합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영어에서 미국말과 호주말 등 다양한 억양을 구분해 알아듣는 것처럼 다양한 억양과 사투리도 더 배워야겠죠.

그렇지만 우리가 걸어 다니고 지하철을 타고 운전을 하는 한 아이즈 프리 혹은 No-스크린 기술은 점점 더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 것이 분명합니다. 이동 중에 많이 사용하는 서비스일수록 N스크린 못지 않게 No-스크린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시리나 S보이스가 오픈 API로 공개되기 전까지는, 많은 모바일 서비스 업체들도 빨리 애플 시리나 삼성 S보이스에 기본 탑재되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 현명해 보입니다.

검색 서비스의 관점에서 시리를 보시는 분들은 벌써부터 시리가 기본 탑재된 서비스와 그렇지 않은 서비스를 차별하고 있다고 우려하시기도 하는데요, 일단은 빨리 아이즈 프리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동 중에 스마트폰을 사용하기가 무척 불편한 것이 현실이고, 특히 운전 중 스마트폰 사용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음성 어시스턴트가 보편화되면 그때 가서 검색 중립성 등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N스크린과 함께 No-스크린의 시대도 머지 않았습니다. 하루 빨리 시리의 한글 정식 버전이 출시되고, S보이스와 구글 어시스턴트 등 경쟁 기술과 함께 빠르게 발전해나가길 기대합니다.

아이즈 프리, 어서 빨리 내 시선을 작은 스크린에서 해방시켜줘!

잡스신의 부재와 애플교의 미래

- 임정욱 대표 강연과 ‘인사이드 애플’을 보고(이 글 내용의 상당수는 강연 내용과 ‘인사이드 애플’ 책에서 따온 것이지만 주장의 내용은 저자나 역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5월16일 저녁, 강남역 근처의 한 강연장에서 ‘인사이드 애플’의 역자인 임정욱 전 라이코스 대표의 강연이 열렸다.

‘인사이드 애플’은 포춘 선임기자인 애덤 라신스키가 애플 전•현직 임원과 관계자를 취재한 결과를 바탕으로, 애플의 내부 시스템과 조직 문화를 파해치고 어떻게 애플이 위대한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조망해보는 책이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공식 전기가 스티브 잡스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잡스 뿐만 아니라 애플이라는 조직과 그 문화를 집중 조명했기 때문에 또 다른 관점에서 애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임정욱 대표는 질의 응답을 포함해 한 시간 반 정도 이어진 이날 강연에서 300쪽에 달하는 책의 내용을 충실히 요약해 전달했다.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청중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이 자리를 메운 사람들의 관심사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 다수의 청중들은 사로잡고 있던 고민은 ‘스티브 잡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애플에서 일군 독특한 기업 문화를 어떻게 하면 내가 있는 회사에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들 중에 몇 명은 벤처기업을 이끄는 사장님이었고, 다른 분들은 애플의 경쟁자로 꼽히는 국내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분들인 듯 했다.(이날 강연은 삼성전자 사옥 바로 뒤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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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방식은 모방 가능한가?

이 질문은 저자인 애덤 라신스키가 ‘인사이드 애플’라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책 1장에서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애플이 이룬 성공은 정말 애플에게만 가능한 특별한 일일까? 아니면 애플은 전 세계 기업가들이 배워야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p.25)”

임정욱 대표는 청중들의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애플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을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친절히 답변했다. 예를 들어 제품 우선, 집중, 단순화, 전문화, 통합, 창의적 인재 우대, 타협하지 않는 정신 등이다.

저자인 라신스키도 9장 ‘애플 방식은 모방 가능한가’를 통해 애플의 장점을 받아들이려는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그 장단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소개된 사례를 살펴보면 이들이 애플 문화의 일부를 차용해 영감을 얻을 수 있을 지언정 애플의 문화 대부분을 흡수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9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스로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새로 태어난 애플의 경영과 운영상의 특징은 모든 비즈니스에 귀감이 된다. 그것은 또한 벤처기업가들을 위한 소중한 핸드북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플처럼 되고자 할 때 빠지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은 애플의 문화는 6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의 현명한 CEO이자 단 한 명의 천재 기업가가 35년간 쌓아올린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회사도 손쉽게 애플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p.270)

나는 임정욱 대표나 라신스키 기자가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세계 최고의 혁신 기업으로 부상한 애플에게서 무언가를 배워보려는 분들의 열정 어린 질문을 단칼에 베어버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애플의 한 두 가지 장점을 취해 자신의 회사에 접목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애플의 문화는 스티브 잡스 개인의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서로 면밀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애플의 방식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기업 문화를 모두 뒤엎으려는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애플은 대부분의 경영 이론에 전면으로 배치되는 유일무이한 사례다. 결정적으로 우리 혹은 우리의 보스는 절대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그가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은 아니다. 너무도 복잡하고 개성 넘치는 인물이며, 누구보다 독특한 인생 역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까다롭게 굴고 성질만 부린다고 애플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 사후에 추모 열기가 일면서 많은 사장님이나 부장님들이 잡스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재빨리 그의 서재에서 스티브 잡스 전기나 애플 관련 책을 찾아내 몰래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고 싶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애플조차도 제2의 스티브 잡스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

그런데 누구도 다시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없다면, 흔히 ‘잡스에 의한, 잡스를 위한, 잡스의 회사’처럼 비취지는 애플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애플은 과연 5년 후에도 지난 15년 동안 보여줬던 놀라운 혁신과 성장을 이어나가며 세계 최고 기업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날 강연에 참석한 청중들의 두 번째 관심사이자, 내가 임정욱 대표의 강연과 ‘인사이드 애플’을 통해 구하고자 했던 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저자 라신스키가 했던 것처럼 애플의 조직과 문화를 들여다보는 것이 최선이다.

애플은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인사이드 애플’을 읽다 보면 애플 조직 문화의 모순된 면이 드러난다. 흔히 경영학 이론에서는 직원들의 동기를 유발하고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직원들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자신이 전체 조직과 프로세스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 투명성을 유지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애플은 철저히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애플 직원들은 매우 한정된 책임과 권한만을 갖는다. 이러한 비밀주의는 자신이 맡은 일이 회사 전체의 전략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지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어떤 직원은 잡스가 “이 회의에서 뭔가 유출된다면 당사자를 해고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회사 고문 변호사들을 동원해 최대한 응징할 것”이라고 말하자 악몽을 꿀 정도 였다고 술회한다.

그 결과 애플 직원들이 맡고 있는 프로젝트들은 하나하나가 퍼즐 조각처럼 분리된다. 완성된 퍼즐의 모습은 조직의 최상위층만이 알 수 있다. 직원들에게 권한을 이양하는 대신 잡스 본인이 세세한 것 하나까지 직접 챙긴다. 애플 직원 대부분은 제품발표회에서 임원들이 선보이는 데모 제품을 보지 않고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경영 이론에서 가르치는 방법과 전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이다. 특히 나를 포함해 전체 프로세스와 내가 맡은 일 사이의 상관 관계와 나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고민하는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애플의 조직 문화가 무척 갑갑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애플에 있는 모든 이들은 밖으로 나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밖에 있는 모든 이들은 애플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애플이 동종 업계의 회사와 비해 큰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물론 스톡옵션을 통해 백만장자가 된 직원들도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애플은 동종 업계의 회사들과 비슷한 수준의 연봉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 직원들은 왜 때로는 휴일을 반납해가면서까지 애플에 충성을 다하는 것일까? (열심히 일하는 애플 내부의 문화는 최근 공개된 애플의 신입사원 환영 메시지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대답의 일부분은 애플 문화의 긍정적인 부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플 특유의 디자인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엔드-투-엔드 통합, 전략적으로 제한된 과제에 집중하고 나머지 아이디어에 No를 외칠 수 있는 문화, 스타트업과 같은 유연한 조직과 뛰어난 인재들과 같은 애플의 장점은 또 다른 뛰어난 인재를 불러모으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을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점이 애플 직원들에게 다른 어떤 보상보다도 더 자극이 되는 모양이다. 애플에서 마케팅 담당자로 일했던 프레데릭 밴 존슨은 “애플 직원들에게는 그런 회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그런 훌륭한 제품에 열정을 받친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바에 앉아 있으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90%가 당신 회사가 만든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멋진 경험이죠.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최근에 기사 작위를 받은 조나단 아이브도 한 인터뷰에서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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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표지 2010년 1월

잡스신의 부재와 애플교의 미래

그러나 이것만으로 애플의 마법을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애플 직원들을 실제로 움직이게 만들었던 동력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스티브 잡스 본인이다.

책에서 한 전직 애플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애플에는 잡스를 숭상하는 강력한 문화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있잖아, 스티브가 이것을 원해. 스티브가 저것을 원해.’ 일상적인 대화에서 ‘스티브’가 매우 자주 튀어나오고 그는 어떤 사람보다 큰 힘을 갖습니다.” 어떤 임원은 “일을 실천에 옮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메일 제목에 ‘Steve request’라고 쓰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임정욱 대표는 강연에서 “애플은 스티브 잡스를 정점으로 한 종교 집단과 같다”라고 설명했다. 저자 라신스키도 애플의 종교성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빙고. 종교성이야 말로 애플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인사이드 애플’ 이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애플의 종교성을 지적한 바 있다. 1986년 초 남성잡지 ‘에스콰이어’는 ‘넥스트’를 설립한 잡스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스티브 잡스의 재림(the Second Coming of Steve Jobs)’라는 제목을 달았다. 저널리스트 앨런 도이치먼도 2000년에 출간한 애플의 재탄생 과정을 다룬 책에 똑같은 제목을 붙였다. 2010년 아이패드가 발표된 뒤 ‘이코노미스트’는 머리 뒤에 금빛 후광이 비치는 예수의 모습을 한 스티브 잡스의 모습을 표지에 실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 뿐만 아니라 애플 내부에서도 왕이나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매주 월요일 열리는 회의를 통해 애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를 파악하고 있었고,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그는 존경과 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의 칭찬 한마디를 듣기 위해 모든 독설을 감내하는 직원들도 많았고, 어떤 직원들을 그와 마주치기를 두려워하기도 했다.

잡스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면서 아마 그 어떤 기업보다 애플 자신이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제 2의 스티브 잡스를 발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을 것이다. 저자도 실제로 스티브 잡스가 누가 다음 CEO가 돼야 하는가를 두고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이 고민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스티브 잡스와 애플 이사회가 차기 ‘교주’로 티모시 도널드 쿡을 선택한 것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또 다른 잡스를 발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가치를 그의 사후에도 애플 내부에 충실히 이식할 수 있는 관리자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잡스가 싫어할 만한 비유지만, 팀 쿡에게 남은 숙제들은 보면 마치 초기 기독교에서 베드로나 바오로가 했던 역할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팀 쿡이 2009년 1월 스티브 잡스가 병가를 떠난 뒤 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컨퍼런스 콜에서 한 발언 – 흔히 팀 쿡 독트린 으로 알려진 – 은 마치 애플교의 교리를 암송하는 듯 했다(인사이드 애플 p134 참조). 그는 자신이 애플교의 가장 훌륭한 신자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장식했다. 잡스가 떠나기 전에 만든 애플유니버시티도 애플교의 교리를 정리하고 설파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팀 쿡을 선택한 것은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으로 둔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싶다. 팀 쿡이 CEO가 된 이후 온갖 우려에도 불구하고 애플 주가는 최대 1400억 달러나 늘어났다. 아이폰4S와 새 아이패드는 공개 당시 일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장에서는 또 다시 사상 최대 판매량을 경신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모두 당초 월가의 예측치를 뛰어넘는 결과다.

만약 팀 쿡이 아닌 스티브 잡스와 유사한 성향의 인물(예를 들어 스콧 포스톨?)을 CEO에 앉혔다면 어땠을까? 혹은 외부에서 제 2의 존 스컬리 같은 인물이 영입됐다면 어땠을까? 결과론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팀 쿡 만큼 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부터 차기 CEO를 염두에 두고 영입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스티브 잡스가 14년 전에 팀 쿡을 데려온 것은 참 현명한 선택이었다. 제 아무리 팀 쿡이라도 외부에서 갓 영입됐다면 애플교의 차기 수장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잡스는 아마 존 스컬리를 영입했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건강이 악화되고 팀 쿡에게 조금씩 권한을 넘기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다만, 팀 쿡호가 지금 순항하고 있다고 할 지라도 이와 같은 좋은 시절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는 스티브 잡스 없는 애플이 빌 게이츠가 떠난 이후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티브 발머 치하의 MS가 망가진 원인 중 하나로 엔지니어보다 MBA 출신을 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면 스티브 잡스가 중용한 MBA 출신은 팀 쿡과 CFO인 피터 오펜하이머 정도였다. 잡스 시절 애플에서는 언제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진리였다.

그러나 팀 쿡 시대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라신스키가 5월24일 포춘에서 보도한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2011년까지 14년간 애플에서 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일했던 맥스 페일리의 발언이 눈에 띈다.

“요즘은 모든 중요한 미팅에서 항상 프로젝트 매니저와 글로벌 공급망 관리자들이 북적거린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있었을 때에는 엔지니어링 쪽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결정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프로덕트 매니저와 공급망 관리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죠.”

기사는 2년 전 애플 직원 가운데 링크드인 프로필에 MBA를 언급한 직원이 10%도 안됐던 반면, 지금은 절반이 넘는 직원이 MBA를 이수했거나 이수하고 있다는 내용도 전했다. 이것은 둘 중에 하나를 뜻한다. 애플에서 MBA 출신이 우대를 받기 시작했거나, 아니면 이들이 애플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라신스키 기자는 기사 말미에서 “더 이상 신은 필요 없고 인간적인 CEO가 필요하다”라며 팀 쿡이 가져온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나는 좀 께름칙하다)

물론 팀 쿡은 이미 성공의 정점에 이른 조직을 물려받았다는 면에서 베드로나 바오로보다는 훨씬 덜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오로의 역할보다 팀 쿡에게 주어진 과제가 한결 험난해 보이는 이유는, 그리스도는 재림을 약속했지만 잡스의 재림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97년 한 차례 재림했으며 우리에게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를 안기고 떠났다. 우리는 모두 그가 또 다시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플의 미래에 대해 저자 라신스키와 임정욱 대표는 “애플이 비상식일 정도로 훌륭한(insanely great) 회사로 남기는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문화를 통해 앞으로도 훌륭한 회사로 남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나는 애플의 미래에 큰 위기가 닥칠 가능성도 많다고 본다. 신의 재림을 보장할 수 없는 종교는 큰 위기가 닥치는 순간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다.

애플의 위기는 아마도 미래에 출시할 제품이 한 번 크게 실패하는 순간 닥쳐올 것이다. 애플의 단순한 제품 라인업은 훌륭한 제품이 끊임없이 나왔을 때 효율성의 극단을 자랑하지만, 한 번 실패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애플이 한 두 번 큰 실패를 맛본다해도 막대한 현금 자산이 회사 자체는 유지시켜 주겠지만, 주가와 인재, 그리고 팬보이는 썰물처럼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

특히 애플팬들은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통해 애플 제품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애플 제품이 업계 선두 수준의 품질로 출시된다고 할 지라도 센세이션한 충격을 주지 않는 한 실망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라신스키는 책에서 나머지 사람들의 기대도 항상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애플 마케팅에서 애플 추종자들이 하는 역할은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다.

잡스가 없어도 애플에서 누군가는 취향이나 소프트웨어 구조와 같은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아마 팀 쿡은 아닐 것이다. 과연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여전히 애플에는 조나단 아이브나 스콧 포스톨과 같은 뛰어난 사람들이 있지만, 키노트와 넘버스가 보여주는 격차를 보면 잡스가 없는 애플을 걱정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프리젠테이션 도구로 꼽는 ‘키노트’는 사실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후 본인이 프리젠테이션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키노트의 형제뻘인 스프레드시트 ‘넘버스’는 키노트처럼 최고로 꼽히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잡스가 스프레드시트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애플의 제품이 항상 넘버스 같은 수준으로 나온다면 나는 더 이상 애플 제품을 사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애플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내놓을 제품에 달려있다. 아이폰4S와 새 아이패드가 순항하고 있지만,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들 제품에서 혁신적인 새로운 면모는 없었다. 과거에 있었던 기술과 인수한 기술을 적용했을 뿐이다. 과연 잡스가 없는 애플에서 앞으로 선보일(지 모르는) iTV나 iCar와 같은 새로운 제품군이 과거 아이팟이나 아이폰, 아이패드가 그랬던 것처럼 혁신적일 수 있을까?

꼭 그러하기를 바란다.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애플교의 신자이고 싶지만 나이롱 신자라서 그런지, 신이 부재하는 상황에 새 교주가 주기적으로 기적이라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계속 신자이기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 일단은 경건한 마음으로 ‘인사이드 애플’을 다시 읽으며 6월에 열릴 신제품 예배에 기대를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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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등이와 삼엽충의 심리적 기원

‘앱등이’와 ‘삼엽충’이 벌이는 설전은 IT 업계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시다시피 ‘앱등이’라 함은 일부 소비자들이 애플과 아이폰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을 비하하며 부르는 말입니다. 반대로 ‘앱등이’들은 이에 못지 않은 삼성빠와 갤럭시빠를 ‘삼엽충’이라고 비꼬며 응수합니다.

다른 IT 제품에 대해서도 팬층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지만, 앱등이-삼엽충 전쟁처럼 적극적이고 과격한 설전으로 번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휴대폰 담당 기자들은 종종 다른 기자들에게 기사에 댓글이 많이 달린다며 부러움의 대상의 되기도 하는데요, 그 중에 많은 경우는 앱등이와 삼엽충의 활약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폰4와 갤럭시S가 한참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던 당시 앱등이와 삼엽충의 과도한 논쟁을 비판하는 글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습니다. 과열된 앱등이와 삼엽충의 싸움이 제품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을 사라지게 하고 무조건적인 깎아내리기로 다른 소비자들의 선택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앱등이-삽엽충 이분법이 밴드웨건 효과를 창출해 애플과 삼성이 아닌 다른 회사가 경쟁에서 더욱 뒤쳐지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며, 이들 기업이 알바를 고용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적해봐야 앱등이와 삼엽충의 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앱등이나 삼엽충도 출발은 한 명의 소비자일 것입니다. 앱등이•삼엽충 전쟁에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입을 닫도록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과연 어떻게 소비자가 자신이 구매한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이 정도로 애착과 열의를 가지게 되느냐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친 제품 사랑이 왜 유독 휴대폰 산업에서 도드라지는가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누구나 조금씩 자신이 선택한 제품에 대해 애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과연 앱등이•삼엽충과 우리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저와 같은 모바일 담당 기자는 아이폰과 갤럭시를 돌려 쓰며 갤럭시 기사를 쓴 날은 댓글을 통해 삼엽충으로 변신하고 아이폰 기사를 쓴 날은 앱등이가 되니, 앱등이와 삼엽충을 넘나드는 박쥐의 운명을 타고 난 셈입니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를 쓴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다니엘 길버트는 2004년 TED 강의에서 행복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요약해서 전해줍니다. 강의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모네의 그림 6점을 놓고 선호도를 매기라고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1번부터 6번까지 번호를 매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합니다. “3번과 4번 그림이 남아있는데 실험에 참여했으니 한 점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그림을 가지실래요?” 다수의 사람들이 선호도가 높은 3번을 골랐습니다.

그로부터 15분 후, 같은 참가자들에게 다시 그림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갖기로 선택한 3번 그림이 선호도 2번으로 올라갔고, 포기한 4번 그림은 선호도 5번으로 내려갔습니다. ‘내 것’으로 삼기로 결정을 하자 불과 15분 만에 그림에 대한 취향이 변한 것입니다. “내 것은 생각보다 좋아, 나머지는 형편없어”의 마법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앱등이와 삼엽충의 심리적인 기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특성 말입니다. 길버트 교수는 이를 ‘심리적인 면역 시스템’이자 ‘만들어진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자기합리화의 과정은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더욱 강하게 발휘됩니다. 길버트 교수는 학생들과 함께 또 다른 실험을 했습니다. 사진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사진을 찍게 한 후 그 중에 가장 선호하는 2장의 사진을 고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 장 중에 한 장은 본인이 갖고 한 장은 과제로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택의 순간입니다.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뉘어졌습니다. 한 그룹에는 과제로 제출할 사진이 발송될 때까지 4일의 여유가 있으니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사진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결정을 번복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다른 그룹에게는 과제로 제출된 사진을 곧바로 영국으로 발송해야 한다며 교환의 기회를 원천 봉쇄했습니다.

그러자 흥미로운 결과가 벌어졌습니다. 선택한 직후에는 두 그룹이 사진에 대한 만족도에서 큰 차이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환할 선택권이 없는 그룹은 만족도가 점점 올라간 반면, 사진을 바꿀까를 고민할 수 있었던 그룹은 점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교환권이 없다’는 사실이 심리적인 면역 시스템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나은 것입니다.

길버트 교수는 이러한 우리의 심리적인 특성을 연애와 결혼에 빗대 설명합니다. 연애할 때 애인이 수시로 손가락으로 코를 후빈다면 헤어질 수도 있겠지만, 결혼한 다음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우리는 “그래도 마음씨는 고운 사람이니까…”라며 심리적인 면역 시스템을 가동시키게 될 것입니다.

휴대폰을 구입하는 것도 결혼과 비슷합니다. 휴대폰은 어떤 IT 기기보다도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제품입니다. 게다가 2년 약정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늘 산 이 스마트폰은 좋던 싫던 나와 함께 2년을 함께 할 것입니다. 아이폰이던 갤럭시던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내 것은 생각보다 좋아. 나머지는 형편없어.”의 마법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할부금과 위약금(어쩌면 위자료?)을 안내받는 순간 우리는 2년 동안 열심히 심리적인 면역 시스템을 가동시키게 됩니다.

물론 항상 자신이 구입한 기기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제품, 이전에 사용하던 제품보다 형편없는 제품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옴니아 시리즈를 꼽을 수 있겠군요. 옴니아는 많은 분들에게 그 전에 쓰던 폴더폰보다도 사랑에 빠지기 힘든 제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최근 출시되는 스마트폰은 그 전에 쓰던 피처폰에 비해 사랑에 빠질 만한 구석이 많아졌습니다. 그 전에는 휴대폰으로 엄두도 못냈던 일을 척척 해내니까요. 내 선택이고 예전 제품보다 좋으니 사랑에 빠지기 충분합니다. 아이폰과 갤럭시에 대한 앱등이와 삼엽충의 사랑도 그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휴대폰에 대한 사랑이 배우자에 대한 합리화보다 위험한 이유는 우리가 휴대폰에 대해서는 결혼 전에 충분히 연애를 해볼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 기사나 대리점 직원의 설명에만 의존해, 맞선 보고 곧바로 결혼식 날짜를 잡듯 휴대폰을 구입하게 됩니다. 남은 것은 오늘 처음 만난 휴대폰과 결혼해 2년 동안 열심히 합리화를 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모두 소비자의 탓은 아니겠죠. 우리나라의 수박 겉핥기식 IT 리뷰 기사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애플이 애플 스토어를 결혼식장(구매 장소)가 아닌 연애 장소(체험 및 교육 공간)로 디자인한 이후 많은 IT 매장이 체험형 공간으로 변화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인간 심리의 면역 시스템은 우리가 인생에서 위기와 실패에 봉착했을 때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고마운 기작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과 현실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과해졌을 때 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닌 것이 되기 십상입니다. 적어도 돈 한푼 받지 않고(심지어 내 돈을 내고) 귀중한 나의 시간을 낭비하며 애플이나 삼성 마케터로 일해줄 필요는 없겠죠.

길버트 교수는 다음과 같은 아담 스미스의 말을 인용하며 강연을 마무리합니다.

The great sourse of both the misery and disorders of human life, seems to arise from over-rating the difference between one permanent situation and another… Some of those situations may, no doubt, deserve to be preferred to others; but none of them can deserve to be pursued with that passionate ardour which drives us to violate thr rules either of prudence or of justice; or to corrupt the future tranquility of our minds, either by shame from the remembrance of our own folly, or by remorse from the horror of our own injustice.

이 말을 우리의 현실에 비춰 아래와 같이 의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 비참하고 무질서해지는 것은 선택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제품은 다른 것보다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제품도 우리가 지나친 열정으로 신중함을 잃거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자신을 뉘우치면서 얻을 수 있는 내면의 평안함을 방해하는 것을 감내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미국인 모리스 빅햄(Moreese Bickham)은 저지르지 않은 범죄 혐의로 루지애나 주 교도소에 37년간 복역해야 했습니다. DNA 검사를 통해 무죄로 밝혀진 것이 78세 때였습니다. 그는 출소 후 “나는 한순간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광스러운(glorious)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고 합니다. 경이적인 합리화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 그는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처럼 살고 싶지 않군요.

제품을 제품으로 바라보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합리화의 기작을 적당히 조절하는 것은 사실 같은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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