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바꾸기 위해 통신사 매장을 방문한 A씨. 다짜고짜 직원한테 이렇게 물어본다.
“요즘 어떤 스마트폰이 잘 나가나요?”
그 말을 들은 매장 직원은 “요즘엔 B폰이 대세죠~”라며 강추한다. 십중팔구 이 말에는 “B폰을 사셔야 제가 제일 많이 남길 수도 있거든요.”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다.
그렇다고 B폰이 대세라는 말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통신사가 보조금을 가장 통 크게 쓰는 제품, 즉 대리점이 가장 많이 남겨먹을 수 있는 제품이 곧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이 되기 때문이다.
최신 유행하는 스마트폰을 구입하려는 A씨의 욕망과 특정 제품의 판매량을 늘리려는 통신사와 제조사의 욕망, 그 과정에서 이익을 많이 보려는 매장 직원의 욕망이 하나로 수렴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다음날 점심 식사 시간. A씨는 자랑스럽게 새로 구입한 최신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회사 동료들이 관심을 보인다. “오~ 이게 새로 나온 B폰이야?”, “역시 A씨는 최신 유행에 민감하다니까~”, “나도 곧 B폰으로 바꿀 생각인데 좋은 어플 있으면 추천 좀 해줘.”
A씨는 휴대폰 참 잘 산 것 같아 으쓱하다. 만족스러운 구매다. 모두가 윈-윈한 것처럼 보인다. 퇴근길 A씨는 쓸만하고 회사 동료에게 추천해줄 만한 어플을 찾아본다. 모 전자회사 전 부회장이 스마트폰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던 대한민국은 그렇게 2년 만에 전국민의 절반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사진 출처 : KT>
얼리어답터의 나라
과거 토종 기업들이 국내 휴대폰 시장을 틀어쥐고 있던 탓에 한국 시장에 도전했던 해외 업체들은 대부분 고배를 마시고 철수해야 했다. 그런데 2010년 한국에 스마트폰 열기가 세게 불면서 다시 국내 시장을 두드리는 해외 업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출시 행사차 방한한 모 기업의 임원에게 다시 한국 시장에 도전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다. 그의 답변은 대충 이랬다.
“한국 소비자들은 대단히 얼리어답터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전국민이 채 2년이 안돼서 휴대폰을 바꿉니다. 그것도 고가의 제품이 더 잘 팔립니다. 현재 한국은 전세계에서 스마트폰이 가장 빠르게 보급되고 있는 국가이고 인구 규모에 비해 훨씬 큰 시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국 시장을 테스트 베드로 여기고 있습니다. 얼리어답터인 한국 소비자들에게 인정받으면 어느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인이 얼리어답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스마트폰 이전에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이 IT 강국 타이틀을 스스로 붙일 수 있었던 데에는 국내 전자 업계의 눈부신 성장과 더불어 초고속 인터넷의 빠른 보급이 한 몫을 했다. 한국이 초고속 인터넷 속도와 보급률 면에서 최상위권이라는 것은 명백한 팩트다.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 과정과 현황을 연구한 해외 리포트까지 발표될 정도였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누구보다도 빠르게 초고속 인터넷을 가정에 설치했다.
유선 인터넷에 이어 스마트폰까지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한국이 IT 강국이라는 명제는 다시 한 번 증명됐다. 밖에서는 역시 한국인은 얼리어답터라며 추켜세웠다.
정말 그럴까? 대체 한국 사람들에게 언제부터 얼리어답터적인 성향이 생긴 것일까? 유선 인터넷과 휴대폰이 보급되기 시작한 90년대부터 였을까? 컬러TV가 보급된 80년대부터일까? 금성사의 첫 흑백TV 경쟁률이 50대 1에 달했다는 60년대부터였을까? 설마 6.25 직후나 일제시대에 이미 얼리어답터였을까? 과연 얼리어답터가 맞기는 할까?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초고속 인프라가 집집마다 깔리고 너도 나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것이 과연 우리가 얼리어답터이기 때문일까? 혹시 정부 주도의 강력한 산업 드라이브나 ICT 업계를 주무르는 국내 대기업들의 강력한 마케팅 때문인 것은 아닐까?
<출처 : Flickr.com, tonymadrid님이 일부 권리를 보유함 CC BY-NC-ND>
스마트폰과 유행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특정 스마트폰이 히트하는 방식이 청소년들 사이에 특정 브랜드가 유행하는 방식이나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 명품 브랜드가 각광받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구입한 휴대폰과 브랜드에 상당한 애착을 보인다. 누군가 자신의 선택을 비판하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휴대폰을 칭찬하면 우쭐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이 구입했던 브랜드에서 신제품을 발표하면, 자신의 휴대폰이 몇 달 만에 구닥다리 신세가 될 것을 우려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스마트폰 구매가 단순히 제품의 선택을 넘어, 하나의 패션이자 자기표현의 단계로 올라섰고 일종의 유행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A씨가 휴대폰 매장에서 먼저 최신 유행하는 스마트폰부터 찾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뤄볼 때 ‘한국인은 얼리어답터다’라는 주장은 ‘한국인은 유행에 민감하다. 일부 IT 제품도 유행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라고 바꿔쓰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 진출을 모색하는 외국 기업이 ‘한국인은 얼리어답터’라고 판단하고 전략을 짜는 순간 망하기 딱 좋다. 스마트폰이 불티나게 팔려도 외국산 스마트폰(아이폰은 논외로 치고)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지도 모른다. 나에게 ‘한국인은 얼리어답터’라고 답했던 그 임원이 속한 기업도 여전히 죽을 쓰고 있다.
반면 국내 통신사와 제조업체들은 국내 소비자들이 얼리어답터가 아니라는 것을 진작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듯하다. 휴대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놓고 선심 쓰는 양 보조금을 팍팍 뿌리고 2년 약정으로 옭아맨 후 2년 후에 또 다시 보조금을 안기는 전략은 대다수 소비자가 얼리어답터라고 판단한다면 도저히 펼 수 없는 전략이다. 연예인 협찬과 방송, 영화 PPL, 여성 잡지 공략 등 휴대폰 회사들의 마케팅 전략도 점점 더 유행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행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유행을 좇는 것은 초과 소비를 유발해 덩치를 불리려는 자본이 우리 내부에 주입한 욕망이다. 물론 상품도 자기 표현의 한 방편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자기 표현은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반대로 자본은 ‘너 스스로를 돌아보는 대신 눈 감고 유행을 좇으라’고 속삭인다.
스마트폰이나 SNS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신이 유행을 좇아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한 새로운 기능, 새로운 기기는 계속 등장할 것이고, 당신은 영원히 따라잡기에 급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행의 급격한 변화를 진보라고 할수는 없다. 스마트폰이 가져온 진보는 새로운 유행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제조사가 던져준 대로 이용하는 대신 사용자가 제각기 본인이 필요로 하는 도구로 개조할 수도 있게 됐다는 점에 있다. 내가 ‘도구는 도구다’라고 외치면서 ‘스마트폰과 SNS가 나를 위해 일하게 하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 휴대폰을 구입할 땐 이렇게 묻는 게 어떨까. “어떤 휴대폰이 잘 나가나요?” 대신 “이러이러한 기능이 필요한데 어떤 휴대폰이 적합할까요?”라고. 만약 대리점 직원이 만족스러운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면 저한테 물어보셔도 좋다. 아는 한도에서 친절히 상담해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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