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좋은 기사를 보면 “이 기사 참 객관적이네”라고 말한다. 마음에 안드는 기사가 있으면 “이 기자 참 주관적이네” 하면서 욕하기도 한다. 그만큼 객관성이라는 요소가 기사의 가치와 신뢰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사가 꼭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객관성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따져보면, 이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객관성은 개인의 주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성질을 통칭한다. 이 말은 곧 이 객관성을 판단하는 개인의 주관으로는 대상이 객관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주관을 넘어서 객관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하는 물음 자체가 유구한 서양 철학사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누구나 자신만의 주관적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현상을 이해한다. 기사도 사람이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쓴 기사를 읽는 것도 사람이다. 그런데 대체 기사의 객관성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취재 대상이 하는 말만 그대로 갖다쓰면 객관적인 기사가 되는 것일까? ‘받아쓰기’ 기사가 될 뿐이다. 이쪽과 저쪽의 의견을 반반씩 분량을 맞추면 객관적인 기사가 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분량의 공평함을 핑계로 철저히 편파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사례를 수도 없이 경험했다. 그렇다면 기자의 모든 의견을 바닥까지 제거하고 나면 객관적인 기사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애초에 가능키나 한 것일까?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김상범 블로터닷넷 대표에게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객관적인 기사는 없다”였다. 처음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신방과 출신이거나 기자 지망생이 아니었던 탓에 언론학에 대해 쥐뿔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기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덕목은 마치 “어른은 공경해야 한다”는 말 만큼이나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선배들의 가르침은 명료했다.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인 기사가 판치는 세상이다. 그럴 바에는 네가 스스로 쓰고 싶은 말을 써라.” 무서운 말이다. 한 문장 쓰려고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는 신입 기자한테 당시 경력 10년차가 넘었던 블로터닷넷 선배들은 “나처럼 써봐”라고 말하고 있었다. ABC를 배우는 학생한테 셰익스피어를 던져준 셈이다.
처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배들의 기사 형식을 흉내내는 것이 전부였다. 형식을 따왔다고 내용과 깊이까지 따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름대로 분석과 비판을 해본다고 하다가 헛발질을 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기자가 사족을 달았네.” 짧지만 강력한 비판이다. 참 아팠다.
실제로 반년 쯤 열심히 기사를 쓰다가 더 이상 글이 안써지는 증상이 생기기도 했다. 김상범 대표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저 기사 못쓰겠습니다. 문장이 안써집니다. 열심히 노력해보겠지만 한 일주일만 이해해주세요.”
나름대로 고충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내 기사를 쓸 수 있게 됐다. 하나 둘 내 기사와 의견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관적인 기사를 쓰라”는 말의 의미도 어렴풋하게 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내 기사를 쓸 수 있게 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철저히 주관적으로 평가한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참 객관적인 기사네요.”
이 제품은 좋다, 나쁘다, 이 제도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고쳐야 한다, 마구 주관을 쏟아낸 기사에 독자들은 ‘객관적’이라고 했다. 내가 더 내 뜻대로 주관적으로 기사를 쓰고 ‘이 기사는 진짜 내 기사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기사일수록 ‘객관적’이라는 댓글은 더 많이 달렸다. 기자가 가장 주관적으로 쓴 기사를 독자는 객관적인 기사라고 하니 이야말로 주관과 객관이 교차되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장자’를 보면 ‘천균(天均)’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늘 ‘천’, 고를 ‘균’이다. ‘천균’이라는 말은 중심 잡히고 균형 있는 상황을 뜻하는 것이며, 장자가 강조하고자 했던 소통의 핵심 키워드로 읽힌다.
균(均)은 또한 도자기를 만들 때 쓰는 물레를 뜻한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에서 천균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물레는 흙덩어리와의 소통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려면, 우리는 제일 먼저 물레의 중심에 흙덩어리를 얹어야만 한다. 만약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흙덩어리를 얹었을 경우, 그것은 물레가 회전하자마자 바로 땅바닥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물레의 중심은 항상 비워져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흙덩어리가 물레의 중심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마음을 물레에 비유하며 마음을 비워야한다고 이야기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구절이다. 천균의 비유가 더욱 강력한 것은 물레가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회전하는 역동적인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옳고 그름, 객관과 주관을 시소의 양 끝처럼 일직선에 놓고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장자는 옳고 그름이 회전하듯 역동적인 상태에 있으며, 소통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단 중심을 비우고 그 중심을 관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사의 개관과 주관의 역설을 풀 수 있는 해답도 장자의 천균에서 찾을 수 있다. 장자 식으로 설명하자면 좋은 기사란 객관과 주관이 맞물려 도는 물레에서 중심을 관통하는 기사다. 의견이 없는 기사가 아니라 중심을 비운, 즉 의도가 없는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회전하는 다트판에서 정확히 한 가운데를 맞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가운데를 맞히기 위해서는 일단 다트를 던져야 한다. 때로는 빗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눈 질끈 감고 ‘주관적인 기자’라고 욕 한 번 먹으면 된다. 심기일전하고 정신을 집중해 다음 다트를 던지면 된다. 던지지 않으면 중심을 맞힐 수도 없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드디어 다트판의 한 가운데를 맞히는 날도 올 것이다. 주관과 객관을 넘어 기자와 독자의 생각이 소통하는 순간이다. 만약 이것을 두고 독자들이 ‘객관적’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주관과 객관은 시소의 양 끝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블로터닷넷 선배들이 그렇게 주관적인 기사를 쓰라고 강조한 것도 후배가 언젠가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와 드는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자식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사자와 같은 스승을 만난 것은 참 행운이었다.
너도 나도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다. 그 말은 곧 불통이 판을 치는 시대라는 뜻일 것이다. 장자의 ‘천균’이 주는 교훈도 비단 기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을 상대하는 정치인, 소비자를 상대하는 마케터, 미녀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남자, 손님을 상대하는 치킨집 사장님, 누구든 소통을 원한다면 천균의 지혜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도 말로, 또 글로 세상을 향해 다트를 던진다. 여전히 마음은 복잡하고 손이 떨린다. 빗나가기 일쑤지만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불스 아이(Bull’s eye). 가끔 명중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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