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시대, 골치 아픈 사진 정리도 스마트하게!

올 한 해 노트북도 SSD를 탑재한 빠르고 조용한 제품으로 바꿨고, 스마트폰과 태블릿도 새로 구입했습니다. 새로운 기기로 이사 가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번거로운 작업도 따라오기 마련이죠. 특히 각종 기기에 나눠서 저장돼 있는 파일들을 정리하는 것이 가장 큰 골치거리입니다.

파일을 정리하다 보니 취재 관련 사진부터 개인적인 추억이 담긴 사진들까지, 지난 10년간 수많은 기기에 나뉘어 저장돼 있는 디지털 사진들이 한가득 입니다. 책장 속 먼지가 수북이 내린 앨범들은 빛은 바랠지언정 언제든 그 자리에 남아있겠지만, 무심코 PC를 버리거나 하드디스크라도 고장이 나면 디지털 사진이 수많은 추억들을 데리고 순식간에 날아가버릴까 걱정이 됩니다.

언제까지 미뤄 둘 수 만은 없습니다. 날을 잡아 디지털 사진들을 정리할 방법을 모색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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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C와 스마트 기기에 나눠서 보관 : 사진을 매번 여러 기기에 옮겨 담기가 불편하고 스마트 기기의 저장 공간이 부담

가장 편한 방법은 비교적 용량이 큰 PC에 모든 사진들을 몰아서 정리해놓고, 일부 자주 볼 사진들만 골라서 나머지 기기들에 분산해서 복사하는 방법입니다. 익숙한 방법이지만 단점이 너무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용량입니다. 고화질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사진 한 장에 수 MB씩 용량을 차지합니다. 그간 쌓인 사진을 모두 합치면 수십 GB는 훌쩍 넘기 일쑵니다. 간간히 동영상도 촬영하다 보면 용량 부담은 더 커집니다.

SSD를 탑재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태블릿에 사진을 복사해놓고 감상하려면 사진 때문에 일부러 비싼 돈을 더 들여 고용량의 제품을 구입해야 할 지경입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같은 파일을 여러 기기에 복사해서 저장하는 것은 스토리지 낭비이자 시대에 뒤쳐지는 방식입니다.

2. 외장형 HDD나 NAS 활용 : HDD는 접근성이 떨어지고, NAS는 비싼 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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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lickr.com,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heipei님이 일부 권리를 보유함

쉬운 대안은 외장형 하드디스크나 NAS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기기에 나눠서 저장을 하는 것보다 경제적인 방법이죠. 그러나 USB로 연결하는 외장형 하드디스크는 아무래도 접근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진을 보고 싶거나 새로운 사진을 저장할 때마다 매번 외장형 하드디스크를 USB로 연결하는 것은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입니다.

하드디스크를 네트워크에 물려 사용하는 NAS를 활용하면 접근성이 훨씬 향상됩니다. 최신 NAS 제품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까지 제공하기도 합니다. 필요에 따라 용량도 손쉽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단점은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쓸만한 제품을 사려면 단번에 수십 만원이 깨집니다. 장기적으로는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을 지 몰라도, 지금 당장 지갑 사정을 생각해보면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차라리 PC에 하드디스크를 하나 더 달자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가정에서 NAS를 사용하기에는 다달이 나가는 전기세도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됩니다.

3. 웹하드 및 통신사, 포털 클라우드 서비스 활용 : 무료 용량은 넘치지만 사진 정리와 감상은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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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클라우드 서비스는 용량은 넉넉하지만 사진을 올려놓고 감상하기에는 부족한 기능이 많다

또 다른 방법은 웹하드나 클라우드 백업 서비스에 사진을 모조리 옮겨 담는 것입니다. 다양한 통신사나 국내외 포털, 해외 전문업체 등에서 수GB에서 수십GB까지 클라우드 백업 서비스 용량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비스를 적절히 활용하면 하드디스크 등 저장 공간에 투자해야 할 용량을 적절히 아낄 수 있습니다. 클라우드 서비스의 동기화 기능을 활용하면 내 컴퓨터의 특정 폴더에 담긴 사진들을 자동으로 클라우드 서비스에 백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N드라이브와 다음 클라우드, T클라우드와 U클라우드, U+박스 등 국내 클라우드 스토리지 서비스는 사진을 담아두기에는 편하지만 감상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사진을 올리면 자동으로 용량을 줄여 사진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진 감상보다는 파일 백업에 중점을 뒀기 때문에 사진을 넘겨보며 옛 추억을 되살려주기에는 UI나 화면 구성이 조잡한 편입니다.

드롭박스, 박스넷 등 해외 서비스들은 지원하는 서드파티 앱이 많아 사진을 보다 편리하게 감상할 수 있지만 무료 용량이 국내 클라우드 서비스보다 현저히 적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4. 아이클라우드 : 애플 제품만 쓴다면 좋은 선택이지만 추가 용량 가격이 비싸고 애플을 떠나지 못하는 불상사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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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에서 아이폰, 아이패드까지 갖가지 애플 제품을 애용하는 애플 마니아라면 아이클라우드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OSX과 iOS용 아이포토(iPhoto) 앱은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에서 사진을 가장 멋지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아이클라우드에 사진을 올리고 아이포토로 감상하면 많은 문제가 쉽게 해결됩니다.

다만 아이클라우드의 용량별 가격이 클라우드 서비스 중에 압도적으로 비싸다는 점이 걸립니다. 무료로 제공되는 5GB는 아이클라우드 백업 등 다른 기능과 나눠써야 합니다. 추가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10GB에 연간 20달러, 50GB는 연간 100달러나 내야 합니다. OSX과 iOS용 아이포토 앱 가격도 더해집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단점은 내 사진을 몽땅 아이클라우드로 옮겨놨다가는 사진 때문에 애플을 떠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비싼 아이클라우드 가격을 매년 지불하면서 평생 애플 생태계 안에서만 뛰놀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애플은 간편한 사진 서비스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기본 제공하는 5GB와 사진 스트림 서비스 정도만 잘 활용하는 게 낫습니다.

5. 피카사와 플리커 : 사진 정리 및 감상에 용이하고 가격이 저렴. 각종 서드파티 앱도 활용할 수 있어 사진 관리에 있어서 최선의 선택

가장 추천하는 방법은 구글 피카사야후 플리커 등 사진 전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야후 플리커는 세계 최대 사진 공유 서비스입니다. 강력한 기능으로 무장했지만 무료 계정으로는 매월 300MB까지만 업로드 할 수 있고, 본인의 사진도 최근 사진 200장만 볼 수 있으며 사진 원본을 다운로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3개월에 6.95달러 1년에 24.95달러만 내면 고용량(최대 50MB) 사진 뿐만 아니라 HD 동영상도 무제한으로 업로드 할 수 있고 언제든지 모든 원본 사진을 올리고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가격 이상의 가치를 뽑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취미 수준 이상으로 사진 촬영을 즐긴다면 플리커는 내가 찍은 사진을 전세계 사진 애호가들에게 뽐낼 수 있는 최고의 채널이 될 것입니다. 다만 사진 서비스는 한 번 이용하기 시작하면 장기간 믿고 써야 하는데 플리커를 운영하는 야후의 미래가 아주 밝지만은 않다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야후가 문을 닫더라도 백업 및 이전 서비스는 당연히 제공되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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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사는 여행이나 단체 사진을 올려 놓고 공유하기에 편리하다

플리커의 가격도 부담된다면 구글 피카사가 최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피카사 웹 앨범의 무료 저장공간은 1GB밖에 되지 않지만, 2048×2048 픽셀 이하의 사진과 15분 이하의 동영상은 저장용량 제한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고화질 DSLR 파일과 긴 동영상을 원본 그대로 저장하지 않아도 된다면 피카사는 무제한 공간을 제공하는 셈입니다.

피카사는 최근 들어 구글 플러스와 강력하게 통합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안드로이드폰을 이용한다면 카메라로 촬영한 모든 사진을 구글 플러스 계정을 통해 자동으로 업로드 할 수 있습니다. PC와 스마트 기기에서 구글 플러스 계정으로 업로드 한 모든 사진은 긴 가장자리를 기준으로 자동으로 2048 픽셀 크기로 조정되며, 무제한으로 업로드 할 수 있습니다. 2048 픽셀 제한이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아이패드 등 고화질 디스플레이에서 감상하기에도 크게 무리가 없는 수준입니다. 고화질 원본 사진을 저장해야 한다면 매월 2.49달러에 25GB, 4.99달러에 100GB를 추가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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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사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는 무료로 강력한 사진 관리 기능을 제공한다

강력한 사진 편집 및 관리 기능을 갖춘 피카사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피카사만의 강점입니다. 사진 편집 및 관리 기능은 다른 전문 사진 관리 소프트웨어와 유사한 수준이지만, 공짜로 이용할 수 있고 피카사 연동이 잘 돼 있어 피카사 웹앨범을 주력으로 활용한다면 굳이 다른 툴을 고집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구글의 강력한 얼굴 인식 기술을 바탕으로 함께 사진을 찍은 인물들을 착착 분류해주는 기능이 매우 쓸 만 합니다.

피카사와 플리커의 또 다른 장점은 해외 사용자들이 많고 API가 잘 마련돼 있어 다양한 서드파티 앱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이패드 사용자라면 그 중에서도 Pixite LLC의 Web Albums HD for Picassa and Google+ 앱과 Flickring HD for Flickr 앱을 강력 추천합니다. 가격은 3.99달러로 유사한 앱 중에 다소 비싼 편이지만, 피카사나 플리커의 사진을 일일이 아이패드로 저장하는 대신 그때 그때 필요한 앨범만 캐시로 불러와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아이패드 저장 공간의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HD 동영상을 보기에는 조금 느리지만, 음악과 함께 다양한 효과를 넣어 즐길 수 있는 슬라이드쇼 기능은 아이포토 다음으로 쓸 만 수준입니다.

또한 가족 여행이나 단체 모임에서 찍은 사진들을 지인들과 공유하기에도 편리합니다. 피카사나 플리커에 앨범을 만들어 올려놓고 해당 앨범만 일부공개로 바꿔서 링크만 보내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처럼 사진을 일일이 리사이즈한 다음 분할압축하고 고용량 메일로 일일이 보내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피카사나 플리커는 스마트TV에서도 지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TV 화면에서 사진을 감상할 때에도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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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Albums HD 앱을 이용하면 피카사 웹앨범에 있는 사진을 아이패드에서 멋지게 감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스마트 시대에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사진 관리 방법을 살펴봤습니다. 다양한 방법 가운데 굳이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는 없겠죠. 개인적으로는 용도에 따라 사진 폴더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드롭박스와 국내 통신사 클라우드 서비스에 나누어 백업을 해둔 다음,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날짜별, 주제별로 앨범으로 담아 피카사에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사진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옛날 사진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피카사에 날짜별로 앨범을 만들어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사진 정리를 시작하고 나서 옛날 사진들이 하드디스크에서 하나씩 사라지면서 부족했던 저장공간이 확보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사진을 보관하던 외장 하드디스크도 조금씩 플리커로 이전하면서 가면서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는 사진 용량을 줄인 덕분에 더 많은 앱과 음악 파일을 담아 다닐 수 있게 됐으며, 특히 아이패드는 피카사 앱을 활용해 사진 용량을 최소화하면서도 최고의 사진 감상 기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른 스마트 기기를 구입하더라도 사진 때문에 일부러 큰 용량을 구입할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

만약 저처럼 다양한 기기에 조각조각 보관하고 있던 디지털 사진들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독자들이 계시다면 이번 주말 시간을 내서 스마트한 클라우드 서비스로 이사를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만약 좋은 방법을 아신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창간기념 끝장리뷰] 애플 아이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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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당시 디퍼스 창간 준비를 시작하며 취재는 손 놓고 있었지만, 아이폰5 발표 행사는 밤새워 지켜봤다. 새 아이폰은 더 빠른 성능과 더 커진 화면, LTE로 무장하고도 더 작고 가벼워졌다. 아이폰만의 ‘매력’은 여전했지만, 반면 옛날처럼 “이건 무조건 사야해!”하는 ‘마력’까지 느껴지지는 않았다. 특히 발표 전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각종 루머가 딱딱 맞아 떨어지면서, 새벽잠을 깨울 만큼 참신한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발표 후 애플의 혁신 동력이 떨어졌다는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폰5 기기의 문제는 아니지만 iOS 6의 소소한 버그들과 차마 지도라 부르기 어려운(특히 국내에선 더더욱) 애플 지도 문제는 충분히 비판을 받을 만 했다. 개인적으로도 새롭게 디퍼스도 창간하면서 당분간 쫄쫄 굶을 텐데, 웬만하면 지금 쓰는 휴대폰들로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안드로이드 많이 좋아졌다. 굳이 통신비를 늘려가면서까지 아이폰5로 바꿀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폰5가 미국에 출시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국내 출시는 오리무중이다. 많은 소비자들이 ‘담달폰’, 혹여 ‘내년폰’이 될 지도 모를 아이폰5를 마냥 기다려야 하나, 다른 스마트폰을 구입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폰5가 예정대로 출시됐더라면 디퍼스닷넷 창간 일정을 훌쩍 앞섰을 텐데, 고맙게도(?) 출시가 지연되면서 창간 기념 리뷰로 아이폰5를 다뤄보자고 결정했다.

이미 국내외에서 아이폰5 리뷰는 여럿 나왔다. 이 리뷰에서는 ‘과연 아이폰5를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개인적인 고민을 심중에 깔고, 아이폰5를 최대한 조목조목 살펴보고자 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독자들께 좋은 안내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연 독자들은 이 리뷰를 끝까지 읽은 후에도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아이폰5를 기다릴까, 기대를 접을까. 궁금해진다.

그럼 어디 한 번 아이폰5를 조목조목 살펴보자.

디자인 Design

모두들 아시다시피 아이폰5에서 가장 큰 변화는 화면 크기가 4인치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아이폰을 한 손으로 조작이 가능하도록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애플은, 좌우 폭은 그대로 유지한 채 위아래 길이만 늘렸다. 사진으로 많이 접했던 것처럼, 딱 아이콘 배열이 한 줄 늘어난 크기라고 보면 된다. 세로 길이가 길어졌지만 손에 쥐었을 때 검지로 전원 버튼을 누르기에 큰 무리는 없는 수준이다.

애플의 설명처럼 아이폰5의 넓어진 화면에서 웹사이트를 조금 더 길게 보거나 메일 목록을 하나 더 보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가로방향으로 동영상을 볼 때에는 전작과 현격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아이폰이 드디어 3:2 화면 비를 버리고 16:9 비율을 가지게 됐다. HD 영상이 화면에 꽉 차게 재생되기 때문에 아이폰4S와 동영상 재생 시 화면 크기 차이는 0.5인치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론 애플이 아이패드에서 4:3 화면 비를 고수하면서도, 아이폰에서는 16:9 비율로 전환한 것이 훌륭한 판단이었다고 평가한다. 큰 태블릿에서는 위아래 레터박스가 있더라도 충분한 크기로 동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자책과 문서를 풀사이즈로 읽을 수 있는 크기로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면 어차피 크기가 작은 스마트폰에서는 동영상 보는 맛을 최대한으로 살려주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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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5(위)와 아이폰4S(아래) 동영상 재생 크기 비교>

좌우 폭을 유지한 덕분에 아이폰의 장점인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아이폰5에서도 동일한 픽셀 밀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기존 아이폰 앱들도 크기를 뻥튀기 시키지 않고 제 크기대로 보여준다. 물론 세로 길이가 남기 때문에 위아래는 레터박스로 검게 처리된다.

기존 앱과 호환성을 유지하면서 화면을 크기를 늘리기에는 위아래만 0.5인치 정도 늘리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아이폰의 앱 생태계는 너무나 커져버렸고, 옛날처럼 애플이 해상도를 바꾼다고 앱스토어의 수많은 앱들이 일제히 크기를 변경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아이폰5가 미국을 비롯해 1차 출시국에서 팔리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레터박스 신세를 져야하는 앱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앱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장점이다.

국내엔 아직 아이폰5가 출시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4인치 화면을 지원하는 앱을 찾아보기 힘들다. 네이버 지도, 다음 지도를 비롯해 몇 개 앱들이 4인치 화면을 지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이버앱과 다음앱도 아직 아이폰5에 맞춰 업데이트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마도 iOS6에서 구글맵이 없어진 기회를 노리고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는 듯 하다.

아이폰5를 처음 만져본 사람들이 가장 먼저 뱉는 말은 십중팔구 “어, 엄청 가볍네” 정도가 될 것이다. 아이폰4S와 비교해 무게가 20%나 줄어들었다. 실제로 손에 줬을 때 가벼운 느낌은 숫자로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두께도 18% 줄어들어 7.6mm에 불과하다. 아이폰4S를 만지다가 아이폰5를 손에 쥐면 실제 제품이 아니라 데목 목업을 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설명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두께를 줄이기 위해 디스플레이 부분도 대폭 손을 봤다. 일반적으로 터치스크린은 픽셀층 위에 터치 전극층을 별도로 둬야 하기 때문에 어느 수준 이상 두께를 줄이기 어려운데, 애플은 픽셀 자체가 이미지를 표시하면서 터치 감지까지 동시에 하는 인셀 디스플레이를 채택했다. 디스플레이 부분만 놓고 봤을 때 30%나 두께가 얇아지는 성과를 거뒀다.

애플은 아이폰5를 더 얇고 가볍게 만들기 위해 디스플레이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공을 들였다. 마이크로SIM보다 작은 나노SIM이라는 규격을 만들어냈고, 2003년부터 줄곧 써왔던 30핀 커넥터도 갈아치웠다. 더 얇고 가벼워진 아이폰5가 주는 ‘손맛’은 둥근 뒷면을 가졌던 아이폰3GS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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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5(왼쪽)과 아이폰4S(오른쪽)의 두께 비교>

아이폰5의 뒷태를 얘기하지 않고 디자인 리뷰를 마무리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드디어 아이폰에 알루미늄 유니바디 디자인이 적용됐다. 다른 애플 제품과 통일성이 더욱 늘어난 셈이다. 안테나를 위해 뒷면 상하단은 인레이 방식으로 유리를 배치했는데, 상당히 고급스러운 투톤 디자인이 완성됐다. 특히 화이트 모델이 인기가 있었던 전작과 달리 아이폰5는 블랙 모델의 투톤 배치가 매력적이다. 또한 모서리 부분을 다이아몬드로 커팅했는데, 외관상 반짝 거릴 뿐만 아니라 손에 쥐는 느낌에도 한결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많은 해외 이용자들이 제기하고 있듯이 실제 이용하다 보면 아노다이징 처리된 모서리 부분이 살짝살짝 벗겨질 수 있다. 범퍼나 케이스를 씌우면 되겠지만 그러면 다이아몬드 커팅 같은 디자인적인 디테일은 포기해야 한다. ‘생폰’의 위험부담이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그 밖에 소소한 변화를 꼽아보자면 아래쪽 내장 스피커 부분이 철망 재질에서 격자 구멍 형태로 바뀌었으며, 이어폰 단자 위치가 위에서 아래로 이동했다. 계속 아이폰을 이용하던 소비자들은 처음에 다소 혼동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휴대폰을 쥐고 있다가 주머니에 넣는 동선을 감안할 때 나쁘지 않은 변화다.

아이폰5의 디자인은 전격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앞면의 화면 크기부터 더 얇아진 옆면, 아노다이징으로 새롭게 갈아입은 뒤태까지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더 얇고 가벼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립갑도 향상됐으니, 아이폰4에서부터 이어져 온 둥근 사각형 디자인의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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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및 성능 Specification & Performance

아이폰5의 두뇌를 책임지는 것은 듀얼코어 A6 프로세서다. 애플이 공식적으로 구체적인 숫자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듀얼코어 1GHz로 동작하며 램(RAM)은 1GB로 밝혀졌다. 앞서 출시된 갤럭시S3가 쿼드코어 1.4GHz에 2GB 램을 갖춘 것을 생각하면 숫자 면에서는 현저히 부족해 보이는 사양이다.

그러나 실제 성능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각종 벤치마크 테스트의 결과에 따르면 듀얼코어 아이폰5는 각종 쿼드코어 안드로이드폰에 필적하거나 간혹 앞지르는 성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웹 서핑 속도를 좌우하는 자바스크립트 처리 및 웹 브라우징 성능 테스트에서는 다른 쿼드코어 스마트폰을 압도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물론 웹 브라우징 부분은 프로세서 뿐만 아니라 모바일 사파리의 성능도 한 몫을 했겠지만, 실사용에서 속도감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좋은 지표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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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5 성능의 비밀은 애플의 칩 디자인에 있다. 애플은 A6 칩에 ARM의 상용화된 아키텍처를 이용하는 대신, 자체적으로 디자인한 커스텀 코어를 처음으로 적용했다. 코드명 스위프트(Swift)로 불리고 있는 이 아키텍처는 현존하는 ARM 상용 아키텍처보다 전력과 성능 면에서 효율이 더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GPU는 수년간 성능 면에서 수위를 지키고 있는 이매지네이션의 PowerVR SGX 543MP3를 채택하고 있다. 이매지네이션과 경쟁사의 격차는 예전처럼 크진 않지만 여전히 최고의 선택이다.

사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의 하드웨어 성능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아이폰5의 성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이폰 전작과 비교하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위의 모든 설명이 복잡한 분들을 위해 쉽게 정리해드리자면 아이폰5가 아이폰4S에 비해 2배 빨라졌다는 애플의 설명에는 조금도 과장이 없다. CPU면 CPU, GPU면 GPU 대부분의 부문의 성능 평가에서 최소 1.8배에서 최대 3.2배까지 빨라진 것으로 나온다.

이미 스마트폰의 성능이 상당히 높아진 상황에서 2배의 성능 향상은 불과 0.x초 차이로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아무튼 전작과 비해 훨씬 쾌적해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적어도 아이폰5의 사양을 보고 “에게, 시절이 어느 시절인데 아직도 듀얼코어야?”하는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겠다. 여전히 배터리가 ‘안습’인 인텔 아톰 탑재 기기를 제외하곤 아직 성능 면에서 아이폰5를 앞지른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없다. (물론 새로운 프로세서를 탑재한 안드로이드폰이 쏟아질 내년 초에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특히 더욱 빠른 네트워크 속도를 자랑하는 LTE와 만나면 빨라진 프로세서 성능은 한층 빛을 발할 것이다.

LTE 지원은 화면 크기, 프로세서과 함께 아이폰5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로 꼽을 수 있다. 아이폰 중에 처음으로 4세대 LTE를 지원하는 제품이다. 1년 전 애플이 아이폰4S를 출시할 당시에도 LTE를 지원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보기 좋게 빗나간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통신 기술이 3세대에서 4세대로 넘어갈 때 애플에 한 차례 위기가 올 수 있겠다고 예상해왔다. 전세계 통신사들이 각기 다른 일정으로 4세대 이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1년에 한 제품씩 출시하는 애플의 제품 주기로는 적절한 타이밍에 대처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 두 모델로 전세계 시장을 커버하기에는 전세계 LTE 주파수가 너무 중구난방이다.

애플은 성급히 LTE를 지원하는 대신 퀄컴의 새 모뎀칩이 서로 다른 LTE 주파수를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폰5에 탑재된 퀄컴의 MDM9615 모뎀칩은 전세계적으로 40여개의 LTE 주파수를 커버할 수 있다. 단지 3개의 모델에서 RF 안테나 부분과 일부 설정 값만 달리하는 것으로 아이폰5는 LTE폰이 될 수 있었으며, 두께도 한층 얇아질 수 있었다.

국내 소비자들은 1년 전부터 안드로이드폰에서 LTE 서비스를 이용해왔기 때문에, 아이폰5가 LTE를 지원하는 것이 큰 변화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애플은 1년에 한 제품 사이클을 유지하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성공적으로 4세대 통신망에 대응할 수 있었으며, 이는 애플 내부적으로는 큰 혁신으로 평가할 수 있다. 1년 전 출시된 아이폰4S는 LTE를 지원하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판매량이 줄지는 않았다. 아이폰5는 단지 3개의 모델로 대부분 국가에서 LTE를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올 초 출시됐던 3세대 아이패드가 북미 지역에서만 LTE를 지원했던 것이나, 최근 출시된 구글 넥서스4가 LTE를 지원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다.

LTE와 관련해 한 가지 남은 포인트는 국내 통신사들의 LTE 서비스와 얼마나 궁합이 잘 맞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아쉽게도 아이폰5를 리뷰하면서 국내 LTE 망에 물려 테스트해 볼 기회는 없었다. SK텔레콤의 메인 LTE 주파수인 850MHz 대역이 전세계적으로 드문 주파수이긴 하지만, 국내 출시가 다소 지연되며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정식 출시 때는 문제 없이 이용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큰 문제 없이 출시된다면 LTE는 소비자들이 아이폰5에서 가장 큰 성능 향상을 체감할 수 있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반대로 일각에서는 아이폰5의 국내 출시가 늦어지고 있는 것이 국내 LTE망과 연동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출시가 장기간 지연되거나 LTE 품질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악재가 될 여지도 있다.

A6칩과 LTE 만큼 결정적인 차이는 아니지만, 카메라 성능도 상당히 향상됐다. 단순히 숫자로 보이는 화소수는 800만 화소로 아이폰4S와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실제로 비교해보면 어렵지 않게 성능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셔터 속도가 40% 빨라져 원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게 됐으며, 연사 능력도 향상됐다. 새롭게 추가된 파노라마 기능은 기존에도 서드파티 앱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지만, 기본 카메라앱에 포함되면서 접근성이 향상됐다. (카메라 기능에 대한 보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 기능 편에서 이어진다)

작아진 라이트닝 커넥터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라이트닝 커넥터는 마이크로USB와 크기가 비슷하지만 애플은 이번에도 표준 단자를 이용하기를 거부했다. 게다가 규격도 USB 2.0에 머물러 전송 속도가 더 빨라진 것도 아니다. 앞뒤 방향을 가리지 않고 꽂을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용자로서는 딱히 장점을 찾기 어렵다. 애플이 기존의 30핀 커넥터를 포기하고 라이트닝 커넥터를 채택한 것은 순전히 아이폰5의 크기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특히 커넥터가 달라진 점은 아이팟, 아이패드 등 기존에 다양한 애플 기기를 이용하고 있거나, 도킹 스탠드, 스피커 독 등 30핀과 호환되는 여러 액세서리를 보유한 소비자들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다. 물론 애플이 기존 30핀 케이블과 라이트닝 포트를 연결할 수 있는 어댑터를 판매하고 있지만 엄지손톱 만한 녀석이 가격은 무려 4만원이나 된다. 게다가 비디오 출력을 지원하지 않는 등 기능도 완벽하지 않다. 기존 애플 제품 구매자가 아이폰5를 추가로 구매할 경우에는 어댑터를 무료로 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제품 크기를 줄이는 것 외에는 큰 장점이 없는 라이트닝 커넥터와 달리 아이폰5의 인셀 디스플레이는 더 나은 디스플레이 성능을 뽐낸다. 픽셀 밀도는 아이폰5와 동일하지만 채도와 명암비가 향상됐다. 그렇지만 사실 아이폰4S의 디스플레이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으며, 새 디스플레이는 크기를 제외하고는 체감하기에 큰 차이를 느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실사용 시에는 채도나 명암비 향상보단 반사율이 낮아진 점이 반갑다.

과거 아이폰4에서 큰 이슈가 됐던 통화 품질 문제는 아이폰5에서는 문제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해외 리뷰들을 살펴보면 콜 드롭 현상 등 과거에 제기됐던 통화 품질 관련 지적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폰5부터는 외부 마이크가 3개로 늘어나는 등 더욱 향상된 노이즈 감소 기능도 적용됐다. 국내 통신사들이 지원하지 않았던 와이드밴드 오디오 기술도 조만간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이폰5 출시를 앞두고 SK텔레콤과 KT가 내년 초에 이 기술을 적용하겠다고 잇달아 밝혔는데 통화 음질 향상이 기대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아이폰5의 배터리다. 다양한 목적으로 연속 이용을 했을 때 상황에 따라 8~12시간 정도 유지된다. 아이폰5가 더 얇고 가벼워졌다는 점과 LTE가 추가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배터리 성능은 매우 뛰어난 수준이다. 아이폰4S와 비교해 배터리 지속 시간이 더 늘어났다는 사용기도 많다. 신제품의 경우 하루 종일 사용하기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면 된다. 다만 배터리 교환은 되지 않으니 헤비 유저의 경우에는 휴대용 충전기를 하나 챙기고 다니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기능 Features

우선 아이폰5의 카메라 기능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이폰5에 탑재된 새 아이사이트(iSight) 카메라는 화소수는 전작과 동일하지만 저조도 촬영과 노이즈 감소 기능이 향상됐다. 보다 어두운 환경에서도 만족할 만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저조명 환경에서 실제로 촬영을 해보면 생각 이상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아이폰4S와 갤럭시S3, 갤럭시 노트2 등 다른 최신 스마트폰에서 찍은 사진과 비교를 해보면 아이폰5 카메라의 우수성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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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아이폰5 갤럭시노트2 갤럭시S3의 야간 촬영 사진. 모두 플래시를 끈 채 초점만 맞추고 촬영>

물론 비교 대상이 된 갤럭시 S3와 갤럭시 노트2의 카메라도 매우 뛰어난 편이다. 이들 카메라에서도 설정에서 야간 촬영 모드를 켜면 저조도 촬영 성능이 크게 향상된다. 그러나 야간 모드를 켜면 셔터 스피드가 크게 느려지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연신 셔터를 눌러대야 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최신 갤럭시 시리즈에서 만족할 만한 야간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삼각대가 필요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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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아이폰5 갤럭시노트2 갤럭시S3. 두 갤럭시에서는 야간모드 촬영 후 흔들리지 않은 사진 선정>

반면 아이폰5는 옵션을 조정하고 팔을 고정시키고 숨을 참고, 할 필요 없이 원하는 곳에 초점만 맞추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만족할 만한 사진을 찍어준다. 사용자가 옵션을 만져야 할 부분이라곤 플래시와 HDR, 파노라마 기능을 켜고 끌 때 뿐이다. 복잡한 설정을 바꾸면서 촬영을 할 바에는 가방에서 DSLR을 꺼내는 게 낫다. 아이폰5는 순간순간 스냅샷을 찍기에 가장 좋은 스마트폰 중의 하나다.

그 밖에 카메라와 관련해 파노라마 기능과 동영상 촬영 중 스틸 사진 저장 기능이 추가됐다. 720p로 페이스타임을 할 수 있는 전면 카메라도 준수하다. 페이스타임을 자주 이용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와이파이 뿐만 아니라 통신사망에서도 페이스타임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것도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아이폰5의 카메라 렌즈를 보호하는 사파이어 크리스탈 글래스는 한 네티즌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플이 돈을 어디다 써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스마트폰은 주머니 혹은 가방에 상시로 휴대하는 제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스마트폰의 사진 품질이 크게 떨어졌다면 커버 글래스가 심하게 더러워졌거나 긁힘이 생기지 않았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커버 글래스에 긁힘이 생겼다면 더 이상 800만 화소냐 1200만 화소냐 하는 숫자 놀음은 중요치 않게 된다. 높은 강도를 자랑하는 사파이어 크리스탈 글래스는 아이폰5 카메라의 품질을 오랫동안 보장해 줄 것이다.

논란이 된 아이폰5 카메라의 보라색 플레어 현상은 테스트 결과 종종 발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논란 직후 미국 컨슈머리포트가 보도했듯이, 강한 광원을 비췄을 때 보라색 플레어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다른 스마트폰이나 소형 카메라에서도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물론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비교 사진을 보면 동일한 환경에서 아이폰5의 플레어 현상이 다른 제품에 비해 조금 더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플레어 현상의 원인으로 사파이어 글래스가 용의선상에 오르고 있지만, 아직까지 원인을 특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태양이나 강한 조명을 직접 화면에 담을 때를 제외하면, 아이폰5는 대부분의 환경에서 현존하는 스마트폰 중에 최고 수준의 사진 품질을 보장한다. 카메라 기능에서 아이폰5와 견줄 수 있는 스마트폰은 휴대폰인지 카메라인지 헛갈릴 정도로 카메라에 힘을 준 노키아 920이나 최근 출시된 옵티머스G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에 풍부한 서드파티 카메라 앱의 활용성과 촬영의 편리함까지 감안한다면,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폰5 카메라가 최선의 선택이다.

지금껏 많이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음질 면에서 아이폰 시리즈는 스마트폰 중에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폰5에서는 애플이 새롭게 선보인 번들 이어폰 ‘이어팟(EarPods)’이 기본으로 제공되면서 음질 부분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음원의 품질과 기기의 출력, 리시버의 성능, 이 세 가지가 음질을 좌우하는 삼박자로 꼽히는데 아이폰은 음원을 제외하고 제조사가 제공할 수 있는 두 가지 품질 면에서 다른 스마트폰을 훌쩍 앞지른다. 아이튠즈 음악 서비스까지 활용할 수 있는 해외에서는 유일하게 제조사가 직접 삼박자를 고루 챙기는 제품으로 꼽을 수 있다.

애플 이어팟의 품질은 최근 이슈가 된 옵티머스G의 번들 이어폰(일명 G어폰)을 앞지른다는 것이 개인적인 평가다. 고음의 분리도를 선호하는 취향을 가진 일부 매니아층은 G어폰이 더 취향에 맞을 수 있겠지만, 이어팟은 충분히 좋은 음질을 보장하면서도 다수의 취향을 적절하게 맞출 수 있는 제품이다. 기존 애플 이어버드와는 비교 불가다. 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즐기기에도 적합하다.

새롭게 번들 이어폰을 업그레이드하고 따로 홍보 영상을 만들 만큼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애플이 음질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진작부터 애플 휴대기기는 음질 면에서 무조건 믿고 산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일부 다른 스마트폰들이 그럴듯한 음장 효과를 탑재하거나 음향기기 전문회사와 제휴해 브랜드 이어폰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아직 애플 만큼 음질에 공을 들이는 스마트폰 제조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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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아이폰5가 모든 부문에서 기능 향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iOS 6.0.1 업데이트를 통해 일부 해결되긴 했지만, 와이파이 접속 문제가 제기되는 등 iOS 6 초기에 다양한 버그가 있었다. NFC는 이번에도 포함되지 않았는데, 사실 큰 단점은 아니다. NFC는 아직까지 교통카드 대용이거나 일부 눈요기 수준의 기능만 제공하는 수준이다. 어차피 국내 제품이 아닐 경우 NFC를 탑재하더라도 국내 NFC 환경과 호환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대신 iOS 6에 추가된 패스북은 앞으로 주목해야 할 서비스임에는 분명하지만, 국내 소비자로서는 아직 큰 효용을 느끼기 어렵다.

이미 많이 논란이 됐듯 진짜 큰 문제는 애플 지도에 있다. 지리 정보가 너무 빈약하다. 국내의 경우는 더 심하다. 심지어 지하철 역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다. 장점으로 내세우는 3D 지도는 먼 나라 얘기다. 애플 지도에 포함된 턴바이턴 내비게이션은 전문 내비게이션기기보다 더 마음에 들 정도로 편리한 인터페이스를 자랑하지만, 지리 정보가 빈약하니 그림의 떡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꼽을 만한 장점은 지도를 벡터 기반으로 제작했다는 점 정도다. 덕분에 사이즈를 늘이거나 줄일 때마다 지리 정보를 일일이 새로 전송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애플 지도 문제가 과연 아이폰5 구입을 망설여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인가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iOS 6 출시 전부터 많은 국내 이용자들이 구글 지도 대신 네이버 지도나 다음 지도 등 국내 지도 앱을 이용하고 있었다. 네이버 지도와 다음 지도는 구글 지도가 사라진 틈을 타 이미 아이폰5 지원 준비를 마치고 스탠바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사용할 때 아쉬운 점은 기본 지도앱을 변경할 수 없다는 점과 서드파티 앱에서 애플의 지도 API를 이용할 경우 지리 정보가 빈약한 애플 맵을 볼 수 밖에 없다는 점 정도다. 현재 위치를 확인하거나 길을 찾거나 교통 정보를 볼 때에는 국내 지도 앱을 이용하면 된다. 또한 국내 지도의 경우 애플이 SK M&C와 접촉을 했다고 하니 조만간 애플 지도에서 구글 지도와 동일한 화면을 보게 될 공산이 크다.

사실 애플 지도 문제는 그간 제품에 대해 꼼꼼하기로 정평이 났던 애플의 이미지를 고려했을 때 상당히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구글 지도를 주로 이용하는 해외 사용자들에 비해 국내 소비자들에게 미치는 불편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애플 사용자의 한 명으로서 애플 지도와 관련해 진짜 아쉬운 부분은 애플 지도의 품질보다는, 지도 관련 논란으로(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iOS 개발을 이끌었던 스콧 포스톨 부사장이 애플을 떠나게 됐다는 사실이다.

에코시스템 Ecosystem

애플의 앱 생태계에 대해서는 굳이 더 할 말이 없다. 경쟁자들이 많이 쫓아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애플 앱스토어는 규모 면에서나 품질 면에서나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우선 아직 아이폰5의 4인치 화면을 지원하는 앱이 그렇지 않은 앱보다 더 많다. 국내에서도 아이폰5를 출시한 이후에도 다수의 앱이 4인치를 지원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부분은 서드파티의 대응에 달린 것으로 전적으로 애플 탓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용자로서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iOS 6에서 개편된 앱스토어의 속도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된 일인지 iOS 5 때보다 더 무겁고 느려졌다. 아이폰5에서도 버벅거릴 정도다. UI가 새롭게 달라지긴 했는데 느려진 속도를 감수할 정도로 개선됐는지는 모르겠다. 이쯤 되면 윈도우용 아이튠즈를 닮아가는 게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올 만 하다.

국내에서 애플의 음원과 영화, TV 시리즈, 전자책 등 다양한 콘텐츠 스토어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다는 것도 해외 이용자들과 비해서 상대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경쟁자인 구글의 경우 올 들어 국내에서도 구글 플레이에 전자책과 영화 코너를 추가하면서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늘려가고 있다. 플랫폼 사업자의 콘텐츠 유통은 애플이 원조 격이지만 국내에서는 구글이 더 발 빠르게 움직이는 셈이다.

유통과 서비스를 책임지는 공식 애플 스토어가 국내에 하나도 없다는 것도 감점 요인이다. 2013년에는 아이튠즈 스토어나 애플 스토어 관련해 좋은 소식이 들리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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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Overall

지금까지 아이폰5에 대해 정말 구석구석 살펴봤다. 새 아이폰은 더 얇고 빠르고 가벼워졌다. 그리고 약간 더 큰 스크린과 LTE도 장착했다. 하드웨어적으로 봤을 때 아이폰5는 분명 아이폰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품임에 틀림이 없다. 반면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애플 지도를 포함해 다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다.

아이폰5를 포함해 애플의 최신 제품을 놓고 애플의 혁신이 옛날 같지 않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스티브 잡스 시절과 팀 쿡 체제의 애플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또한 당연하다. 그러나 아이폰5를 놓고 애플의 혁신이 멈췄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다. 아이폰5가 예전처럼 ‘넘사벽’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애플의 혁신이 멈춘 탓인지 스마트폰의 성능과 기능이 어느 정도 한계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인지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하드웨어 부분만 놓고 봤을 때에는 삼성전자 등 일부 경쟁자들이 아이폰을 추월할 정도로 빠르게 추격해 왔다. 어떤 제품은 아이폰5보다 더 빠른 CPU를 장착했고, 어떤 제품은 아이폰5보다 더 사양이 뛰어난 카메라를 달고 나왔다. 게다가 안드로이드에는 위젯을 포함해 iOS에는 없는 기능들이 분명 있다. 구글 지도도 있다.

또한 아이폰5와 iOS 6에서 과거 애플이 아이튠즈나 앱스토어, 아이클라우드 통해 보여줬던 수준의 충격적인 변화를 느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 점에 실망했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소프트웨어와 디자인, 서비스와 앱 생태계를 모두 포함해서 봤을 때에는 선뜻 아이폰5보다 우위에 있는 제품을 꼽기 어렵다. 과연 이 차이가 과연 휴대폰 교체 비용을 감수해야 할 정도인가 하는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이 긴 리뷰를 읽고도 아직 아이폰5를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한 해외 리뷰어가 썼던 이 문구을 인용하고 싶다. “직접 손에 쥐어보기 전에는 아이폰5를 본 게 아니다.” 그만큼 아이폰5의 손맛은 기대 이상이다. 구매에 확신이 없다면 예약판매 때 덜컥 지르기보단 가까운 리셀러 매장을 방문해 직접 만져볼 것을 추천한다.

[본격 구뉴패드 추모 소설] 아이패드 3세대는 왜 단명했나

121119 bye_ipad3아이패드 3세대(당시 정식명칭 : The new iPad, 이하 ‘뉴패드’)는 개인적으로 유독 애착이 가는 기기다. 올 봄 블로터닷넷을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공들여 썼던 글이 뉴패드에 대한 리뷰 시리즈였다.

3월19일이었다. 운 좋게도 미국에 최초로 출시된 지 불과 사흘 만에 뉴패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뉴패드에 새롭게 추가된 레티나 디스플레이와 더불어 국내 LTE 주파수 호환 문제와 발열 논란으로 국내외 언론이 시끄럽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였다. 일찌감치 제품을 입수한 담당 기자로서, 과연 국내에서 LTE를 이용할 수 있을지, 정말 일부 외신 인용보도처럼 발열이 심각한 수준인지 독자들에게 전해드려야 할 내용이 많았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뉴패드를 끼고 지내면서 시리즈로 리뷰 기사를 작성했다.

지금도 당시에 독자들이 SNS와 댓글을 통해 남겨주신 반응을 잊지 못한다. 이후 꽤 오랜 시간 기자 일을 쉬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분야로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디퍼스를 통해 복귀하게 된 것도, 그 때 이후로 수시로 SNS를 통해 “왜 요즘은 기사 안 쓰냐”며 잊지 않고 재촉해주신 독자 여러분 덕분이다.

퇴사 이후 긴축 재정(?) 상태에서 가장 먼저 지갑을 털어간 기기도 뉴패드였다. 회사에서 지급받았던 노트북과 기기들을 반납하고 나니 저렴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컴퓨팅 기기가 필요했다. 아이패드 3세대는 다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위해 노트북을 구입하기 전까지 훌륭하게 개인적인 웹 서핑과 엔터테인먼트를 책임져줬다. 레티나의 위용을 한껏 뽐내며 눈을 버리게 해준 것은 보너스다.

그랬던 뉴패드가 이달 아이패드 4세대(정식명칭 : 아이패드 레티나 디스플레이, iPad with Retina display) 출시와 함께 불과 7개월 만에 수명을 다했다. 지난 10월23일 신제품 발표 행사를 보다가 애플이 아이패드 미니에 이어 아이패드 4세대까지 꺼내 들자 슬슬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뉴패드가 벌써 뒷방으로 밀려나다니!” 발표 전에도 아이패드 4세대에 대한 루머는 있었지만 이번 행사가 아니라 내년 봄 쯤에 발표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https://twitter.com/ezoomin/status/260802230947573761

아이패드 4세대 발표 당시 멘붕에 빠졌다 

뉴패드 단종 소식에 멘붕 증상을 겪은 것은 기자 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는 아이패드 3세대 사용자들의 한탄 섞인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도 아니고 애플이…” 이젠 더 이상 뉴패드로 부를 수 없다며 ‘구뉴패드’라는 새로운 별명도 붙여졌다.

https://twitter.com/ChiC_hi/status/263472869856661504

https://twitter.com/DrunkenSJ/status/264368806762258432

https://twitter.com/lemonpig88/status/267822981529624576

https://twitter.com/haewoon/status/264383030712492032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뭔가 께름칙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보다 저렴한 아이패드 미니가 나왔는데 아이패드2는 대체 왜 살려둔 것일까? 아이패드 제품군이 2개에서 3개로 늘어났는데 앞으로도 계속 유지가 될까? 만약 아이패드 4세대 외에 보다 저렴한 9.7인치 라인업이 필요했다면 왜 뉴패드가 아니라 아이패드2였을까? 뉴패드의 이름은 왜 The new iPad였고, 왜 아이패드 4세대는 iPad with Retina display가 된 것일까? 레티나는 뉴패드에도 있었는데?

해상도에 대한 실망스러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왜 아이패드 미니는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탑재하지 않은 것일까? 소문대로 내년에는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모델이 나올까? 그럼 갓 출시된 아이패드 미니는 또 몇 달 만에 ‘구뉴미니’가 될 운명일까?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한국에 앉아서는 딱히 의문을 풀 만한 단서를 찾기 어려웠다.

역시 미래에 대한 최고의 설명서는 과거에 있나 보다. 요즘 들어 애플의 미래에 대해 이래저래 말이 많아 스티브 잡스 전기를 다시 들춰보고 있었다. 90년대 후반 애플이 몰락하던 시점부터 스티브 잡스가 다시 복귀하던 구절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다. 일명 스티브 잡스의 사분면 도표 부분이 소개되는 부분이었다.

1997년 iCEO로 컴백한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되살릴 방안으로 선택과 집중을 택했다. 당시 10여 개에 달하던 맥킨토시 제품에 대한 보고를 받던 잡스는 직원들에게 되물었다. “어떤 걸 내 친구들한테 사라고 하면 좋을까?” 간결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잡스는 제품의 70%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얼마 후 제품 전략 회의에서 그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 가로선과 세로선을 긋고 이렇게 생긴 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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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llaboutstevejobs.com / theregister.co.uk 재인용>

4개의 제품에 집중하고 나머지 제품들을 정리해버린 스티브 잡스의 결단은 애플 회생의 발판이 된다. 잡스가 복귀하던 해에 애플은 10억4천만 달러 적자를 기록하며 존폐의 위기에 몰려있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3억9백만 달러 흑자로 돌아섰다. 비록 이제 잡스는 없고 애플의 제품 영역은 훨씬 넓어졌지만, 이후에도 애플은 제품 라인업을 꾸리는 데 아래와 같은 표를 그리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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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ailyfinance.com>

그렇다면 한 번 소설을 써보자. 만약 애플이 내년 초에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출시하면서 아래와 같은 그림을 보여준다고 해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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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소설을 쓰는 김에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출시된다면 시기는 내년 상반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모바일 제품 주기가 가을로 넘어간 상황에서, 애플로서는 상반기에 선보일 신제품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문제는 만약 내년 상반기에 새 아이패드 미니가 출시된다면 올해 아이패드 미니를 구입한 소비자들은 구뉴패드 사용자들처럼 또 다시 멘붕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패드 미니가 여전히 현역이 되고 상위 모델로 레티나 디스플레이 모델이 출시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아이패드 미니보다 높고 아이패드 4세대와 비슷하거나 다소 낮은 사양을 갖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A5X(아이패드 3세대 탑재)와 A6(아이폰5 탑재), A6X(아이패드 4세대 탑재) 가운데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충분히 구동하면서 배터리 지속시간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는 프로세서를 탑재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대가 관건인데, 프로용 제품으로 포지셔닝 하면서 아이패드 제품군 가운데 빈 가격대인 429달러로 출시하거나, 가격 공세를 펼치고 있는 안드로이드 태블릿에 대응하기 위해 329달러로 출시하고 기존 아이패드 미니의 가격을 인하하는 두 가지 방안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프로세서와 새 레티나 디스플레이,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얇으면서도 빵빵한 배터리 등이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디스플레이의 가격을 좌우할 것이다.

혹자는 아이패드 제품군이 늘어나면서 기존의 아이팟 터치 제품군과 상위 아이패드 제품군을 자기잠식(Cannibalization)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지금껏 애플이 자기잠식을 걱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같은 논리라면 아이폰은 아이팟을 잠식할 우려가 있었고, 아이패드는 맥을 잠식할 우려가 있었다.

자기잠식은 수익성이 낮은 제품이 수익성이 높은 제품을 잠식할 때 문제가 된다. 현재 애플이 하고 있듯이 각 제품군이 모두 충분한 마진율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신제품을 선보인다면 자기잠식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출이 다변화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더군다나 태블릿 시장과 같이 급격히 성장하는 시장에서는 자기잠식은 커녕 시장 파이를 더 키울 가능성이 높다. 안드로이드 태블릿들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애플이 아이패드 미니 가격을 넥서스7 수준으로 낮게 책정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애플이 내년 상반기 아이패드 미니 레티나 디스플레이와 함께 기존 아이패드2를 대체할 새 아이패드를 선보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아이패드2가 완성도 높은 모델이긴 하지만 내년 하반기까지 현역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노병이다. 상위 제품으로 레티나 모델이 있기 때문에 새 아이패드는 아이패드2처럼 레티나를 탑재하지 않은 채 성능만 향상될 것이다. 가격은 현재 수준으로 유지한 채 ’2′ 자를 떼고 구뉴패드의 ‘The new iPad’ 이름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아이패드 제품군은 (The new) iPad mini / iPad mini with Retina display / (The new) iPad / iPad with Retina display 네 가지 모델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소설을 한 번 써본다.

참,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글은 어디까지나 구뉴패드의 단명을 추모하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애플이 소설대로 아이패드 제품군을 갖춰 나간다면, 구뉴패드는 레티나 탑재에서 LTE 지원, 커넥터 변경까지 애플 제품에 큰 변화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아이패드 제품군을 완성하는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해낸 셈이다.

아이패드 라인업을 완성하기 위해 짧은 시간 ‘몸빵’을 하고 우리 곁을 떠나는 구뉴패드야, 그동안 수고 많았다. 앞으로 뉴뉴패드와 더 자주 놀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렴. 너는 언제까지나 최초로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아이패드로 기억 속에 남을 거야. 이젠 안녕.

쿼드코어 스마트폰의 현재와 미래

이 글은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모바일 트렌드 매거진에 기고하기 위해 6월 초에 작성한 글 원문입니다. NIPA 모바일 트렌드 매거진 이번 호는 다음주 쯤 발간될 예정입니다.

여름 스마트폰 시장은 쿼드코어로 후끈

듀얼코어를 살까, 최신 쿼드코어를 사야 할까? 컴퓨터 얘기가 아니다. 스마트폰에도 쿼드코어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해외 시장에는 이미 상반기부터 쿼드코어 프로세서를 탑재한 스마트폰이 하나 둘 선보이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6월부터 삼성전자 갤럭시S3를 시작으로 쿼드코어 스마트폰이 속속 출시될 예정이다.

1GHz대 싱글코어 스마트폰이 높은 사양으로 주목을 받았던 것이 불과 2년 전인 것을 생각해보면 모바일 프로세서의 발전 속도가 얼마나 빠른 지를 실감할 수 있다. 듀얼코어 프로세서가 보편화된 이후 한동안 스마트폰 시장의 경쟁 요소가 화면 크기와 해상도 등으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쿼드코어 스마트폰의 출시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프로세서 경쟁이 불붙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samsung-galaxy-s3-usa-release

국내 첫 쿼드코어 스마트폰이 될 삼성전자 갤럭시S3

언제부터 휴대폰에서 프로세서가 중요해졌을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일반 휴대전화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아무도 휴대전화에 탑재되는 프로세서가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해진 사양에서 제조사가 내장한 제한된 기능만 이용했기 때문에 굳이 소비자가 더 빠른 하드웨어 성능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일반 소비자들이 프로세서 성능을 따지는 것은 몇 년을 주기로 새로운 운영체제와 고사양의 게임이 출시되는 PC 시장에 국한된 얘기였다.

그러나 소비자가 직접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 이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조금씩 프로세서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1년에 한 모델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최적화해 제공하는 애플 아이폰과 달리, 빠른 속도로 아이폰을 추격해야 했던 안드로이드 진영에서는 프로세서의 컴퓨팅 파워가 더욱 중요했다. 빠른 속도로 다양한 단말기를 출시하기 위해서는 운영체제를 하드웨어에 최적화해서 담아내기가 어려웠고, 성능 면에서나 마케팅 측면에서나 빠른 프로세서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 틈새를 빠르게 공략한 회사가 퀄컴이었다. 퀄컴은 1GHz라는 상징적인 클럭 속도를 선점하는 동시에 ‘스냅드래곤(snapdragon)’이라는 브랜드를 히트시키며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에 브랜드 시대를 열었다. 1GHz급 스냅드래곤은 구글 넥서스원을 비롯해 HTC 디자이어와 HD2, 소니에릭슨 엑스페리아 X10 등 2010년에 인기를 끌었던 주요 스마트폰에 잇달아 탑재되며 많은 관심을 끌었고, 통신칩과 프로세서를 통합한 ‘윈칩’ 설계로 모바일 시장에서 비교 우위를 가져갔다.

퀄컴이 통신 원천기술을 가지고 통신 모뎀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하나로 통합한 원칩 설계에 주력했다면, 삼성전자와 엔비디아, 텍사스 인스투르먼츠(TI) 등은 프로세서 자체의 성능을 높이는 쪽에 초점을 맞추며 퀄컴을 빠르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엔비디아와 TI는 퀄컴에 한 발 앞서 듀얼코어 프로세서를 상용화하며 역공에 나섰고, 삼성전자도 엑시노스(Exynos)라는 모바일 프로세서 브랜드를 런칭하고 갤럭시S2 등 자사 제품을 중심으로 탑재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넓혀 나갔다.

exynos4 and tegra3

삼성전자 엑시노스4 프로세서(왼쪽)와 엔비디아 테그라3

올 초에 열린 CES 2012와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2012에서는 쿼드코어 프로세서와 이를 탑재한 신제품이 대거 공개되며 올 여름 쿼드코어 스마트폰 대전을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상용화된 모바일 쿼드코어 프로세서는 엔비디아의 테그라3(Tegra 3), 삼성전자의 엑시노스4 쿼드 시리즈, TI의 OMAP5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중국 화웨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쿼드코어 프로세서 K3V2를 공개하며 고사양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에 출사표를 내밀었다.

이와 달리 스냅드래곤으로 초기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했던 퀄컴은 쿼드코어 프로세서의 상용화가 다소 늦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신 듀얼코어 프로세서와 LTE 통신칩을 하나로 통합한 스냅드래곤 S4 시리즈로 LTE 듀얼코어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은 싱글코어 시절의 클럭 속도 경쟁에서 최근에는 듀얼코어에 이어 쿼드코어에 이르기까지 코어수를 늘리는 쪽으로 경쟁의 방향이 옮겨가고 있다. 쿼드코어 프로세서를 탑재한 스마트폰 가운데 출시됐거나 출시를 앞두고 있는 주요 제품은 아래 표와 같다.

쿼드코어 스마트폰의 장단점은

쿼드코어 스마트폰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속도다. 초기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하드웨어 사양이 제한적이었던 탓에 같은 하드웨어 사양을 갖춰도 제조사의 운영체제 최적화 능력에 따라 성능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쿼드코어 스마트폰은 하드웨어 성능으로 이러한 문제를 대부분 커버해줄 것이다. 스마트폰과 PC의 성능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일부 제품은 RAM도 2GB까지 늘린다고 하니 웬만한 구형 노트북 부럽지 않은 사양이다.

스마트폰에서는 단순히 성능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전력 소비를 낮춰서 배터리 지속시간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가도 중요하다. 실제로 다양한 제품이 출시돼 봐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다행히도 모바일 칩셋 업체들의 발표를 보면 쿼드코어 프로세서에서 전력 소비 문제는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 반도체 공정이 40nm에서 최대 28nm 수준으로 정밀해지면서 코어당 전력 소비가 다소 줄어들었고, 상황에 따라 4개의 코어를 유동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을 도입해 전력 소비를 낮출 수 있게 됐다. 엔비디아 테그라3의 경우에는 4개의 코어 외에 배터리 절약용 저전력 코어를 하나 더 추가해 음악 재생 등 간단한 작업에서는 저전력 코어만 가동하는 방식으로 배터리 전력을 더욱 낮추는 설계를 적용하기도 했다. 퀄컴은 쿼드코어 경쟁에서 한발 뒤졌지만 향후 출시할 제품에서 4개의 코어를 각기 다른 클럭 속도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도입해 소비 전력을 더욱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nvidia tegra 3 architecture

엔비디아 테그라3 프로세서는 1개의 저전력 코어를 추가하고 총 5개의 코어를 유동적으로 사용해
전력 소비를 낮추는 설계가 적용됐다

반대로 LTE 지원 여부는 쿼드코어 스마트폰이 풀어야 할 숙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LTE를 상용화한 선진 시장에서는 통신사들이 3G 스마트폰보다 LTE폰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 상황과는 달리 지금까지 출시된 쿼드코어 스마트폰은 대부분 LTE를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LG-Optimus-4X-HD-P880-2LTE 스마트폰은 데이터 통신은 LTE로, 음성통화는 3G망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두 개의 채널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기술적인 과제를 앉고 있다. 초기 LTE 스마트폰에서는 3G 모뎀과 LTE 모뎀, AP를 각각 별도로 탑재했기 때문에 배터리 지속시간이 충분치 못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배터리 관리 기술이 발전하고 퀄컴이 LTE와 3G 모뎀, 듀얼코어 프로세서를 하나로 통합한 스냅드래곤 S4를 출시하는 등 해결책이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쿼드코어에서는 LTE를 지원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있는 셈이다.

LTE와 쿼드코어를 통합한 퀄컴의 원칩 프로세서를 탑재한 제품은 이르면 올 연말부터 출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엔비디아도 2013년 출시를 목표로 AP와 통신칩을 통합한 프로세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삼성전자가 갤럭시S3 제품 중에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내 시장에 쿼드코어 프로세서에 LTE 모뎀을 별도로 탑재한 모델을 선보인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쿼드코어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모바일 환경에서 쿼드코어 프로세서를 활용해 무엇을 할 것인가, 즉 쿼드코어의 킬러 서비스가 무엇인가 하는 점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웹 서핑이나 메일 확인, SNS와 모바일 메신저 등 스마트폰에서 많이 활용하는 기능을 쓰기에는 듀얼코어 프로세서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쿼드코어 프로세서를 탑재했다고 해도 3D 게임 등 고사양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제외하면 4개의 코어를 모두 활용하지 않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에, 간단한 작업을 할 때에는 쿼드코어의 성능을 쉽게 체감하지 못할 수 있다.

향후 쿼드코어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면 서드파티 개발자들이 다양한 활용법을 찾아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쿼드코어 킬러 서비스로 무엇을 꼽아야 할 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동안 쿼드코어의 킬러 앱은 향후 출시될 고사양 3D 게임 정도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실 고사양의 게임을 즐기지 않는 다수의 소비자들은 당분간 쿼드코어 스마트폰을 구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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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C가 해외 시장에 먼저 선보인 쿼드코어폰 One X, 국내에도 올 여름 출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하반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쿼드코어 제품이 각광을 받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까지 국내 소비자들은 저가폰보다는 고사양의 스마트폰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왔고, 제조사와 통신사도 갤럭시S3를 필두로 쿼드코어 스마트폰을 주력으로 내세울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쿼드코어’라는 이름이 가지는 마케팅 파워가 십분 발휘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2013년 이후로는 쿼드코어 2GHz 급 프로세서가 출시되는 등 프로세서 성능이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스마트폰 시장도 PC 시장처럼 단순한 클럭 속도나 코어수 경쟁이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크다. 단말기 성능이 상향 평준화될수록 일반적인 기능만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는 듀얼코어 이하의 제품을 선택하고, 고사양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만 쿼드코어 이상의 제품을 구입하는 등 PC 시장처럼 가격과 이용 목적에 따라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적으로는 스마트폰 시장도 쿼드코어를 앞세운 하이엔드 시장과 듀얼코어 이하의 보급형 시장으로 양분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들어 스마트폰 가격이 100만원을 웃돌고 있고 많은 않은 소비자들이 단말기 할부금과 통신비에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듀얼코어 수준의 충분한 성능을 갖춘 스마트폰이 저렴한 가격으로 떨어진다면 보급형 시장이 예전보다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신 쿼드코어 프로세서는 스마트폰을 넘어 안드로이드 태블릿PC와 윈도우8 태블릿PC 등 더 강력한 성능을 필요로 하는 모바일 기기에서 널리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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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노트북처럼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모토로라 랩독

또한 쿼드코어의 컴퓨팅 파워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확장 액세서리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록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모토로라가 아트릭스와 함께 선보였던 랩독과 멀티미디어독이나, 최근 아수스가 공개한 패드폰 같은 제품이 대표적이다. 스마트폰에 큰 스크린을 끼워 태블릿PC나 노트북처럼 활용하거나, TV에 연결해 셋톱박스나 스마트TV처럼 활용하는 등 고성능의 스마트폰을 단순한 휴대폰을 넘어 모바일 컴퓨팅의 허브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계속될 것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는 쿼드코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에서 멀티 로그인이나 운영체제 가상화도 보편화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스마트폰으로 집에서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쓰다가 출근해서는 윈도우폰 운영체제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물론 지금은 제조사들이 하나의 운영체제를 최적화해서 탑재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제공하기에도 버거워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현실화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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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스에서 공개한 패드폰. 스마트폰에 스크린을 끼워 태블릿처럼 이용할 수 있다

아이즈 프리! 스마트폰, 내 시선을 해방시켜줘

시리와 아이즈 프리

6월11일(현지시간) 개막한 WWDC 2012에서 애플은 새 iOS6를 공개하면서 음성인식 솔루션인 시리(Siri)의 기능을 대폭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어 지원이 곧 추가될 것이라는 소식이 반갑습니다. 발표 직후 공개된 iOS 6 베타1에는 이미 한국어판 시리가 추가돼 많은 개발자들과 얼리어답터들이 설치해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어에서는 부족한 점도 많이 엿보이지만, 한국인 개발자와 얼리어답터들의 참여로 정식 출시 때까지 많은 학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리는 여러 면에서 다른 음성인식 솔루션과 비교해 한 단계 진일보한 솔루션입니다. 정해진 명령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어를 인식할 수 있고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울프람 알파나 옐프(Yelp), 오픈테이블, 로튼 토마토, IMDB 등 다양한 서비스와 제휴해 영화, 식당, 스포츠, 영화 등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음성만으로 쉽게 검색해주고 직접 예약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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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12개월 이내에 시리에 한국어를 추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iOS6 베타에 한국어 시리가 포함돼 9월 iOS6 정식 출시 때 함께 공개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시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입’과 ‘귀’와 ‘눈’이 유기적으로 통합돼 있다는 것입니다. 시리 이전에 있었던 대부분의 음성 관련 솔루션은 음성 명령과 음성 검색, 받아쓰기(Speech-to-Text), 읽어주기(Text-to-Speech) 등 여러 기능이 각자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형태였습니다. 음성 명령은 음성 명령 기능에서, 음성 검색은 검색 앱이나 위젯에서, 받아쓰기는 문자나 메일 앱에서 키보드를 불러내서, 읽어주기는 TTS 기능을 제공하는 별도의 앱을 실행시켜야 쓸 수 있었습니다.

시리는 이러한 모든 기능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이용자는 음성 명령 기능이나 문자메시지함, 메일함,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별도로 실행시킬 필요 없이 시리만 불러내면 됩니다. 시리는 이용자의 명령을 판단해 적절한 기능을 실행하고 그 결과를 말과 글, 표 등 적절한 형태로 보여줍니다. 애플이 시리를 음성인식이나 음성명령 솔루션이라고 부르지 않고 지능형 개인 비서(intelligent personal assistant)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시리를 이용할 때에도 복잡한 기능을 쓰기 위해서는 화면을 직접 보는 것이 좋지만, 간단한 기능은 스마트폰 화면을 보지 않고도 아이폰을 귀에 대거나, 이어폰이나 핸즈프리 헤드셋의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화를 걸고 음악을 재생하는 등 기본적인 기능은 물론,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페이스북, 트위터에 글을 올리거나, 새로운 일정을 캘린더에 등록하거나 스포츠 경기 결과를 확인하는 등 많은 작업을 아이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고도 몇 마디 말로 대신할 수 있고 그 결과도 간단히 음성으로 안내 받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음성관련 솔루션이 시리와 같은 형태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미 삼성전자는 갤럭시S3부터 탑재되는 S보이스에서 시리와 유사한 기능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글이 개발하고 있다는 구글 어시스턴트도 기존의 보이스 액션이나 음성 검색, 음성 받아쓰기 기능을 하나로 통합한 지능형 솔루션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 면에서 스콧 포스톨 iOS 담당 수석부사장이 이번 기조연설에서 ‘아이즈 프리(Eyes Free)’라는 신조어를 들고 나온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핸즈 프리가 전화통화에서 우리의 손을 해방시켜줬다면, 아이즈 프리를 통해 이동 중에 우리의 눈까지 해방시켜주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IT 업계에서는 N스크린 경쟁이 한창이죠.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스크린을 이용하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가 24시간 내내 스크린을 끼고 살 수 있을까요? 스마트 기기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스크린을 볼 수 없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N스크린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한 켠에는 이미 시리를 필두로 한 ‘No-스크린’ 혹은 ‘아이즈 프리’ 경쟁이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20611 apple eyes free스콧 포스톨 애플 수석부사장이 Eyes Free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애플 키노트 영상 캡쳐)

N-스크린이 대세? No-스크린도 있다!

길을 걷다보면, 걸어가면서 스마트폰 화면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SNS 등 걸어가면서도 스마트폰으로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걸어가면서 스마트폰을 쓰기에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흔들리는 화면을 붙잡고 작은 터치스크린을 두드려 글을 입력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오타도 많이 납니다. 걸어가면서 스마트폰으로 지도라도 검색하려고 하면 차라리 발길을 멈추는 편이 속 편합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안전입니다. 시선을 작은 스크린에 빼앗기는 동안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동 중에도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길을 걷다가 전봇대와 조우하거나 골목길에서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디거나, 횡단보도에서 스마트폰을 보다가 옆 사람이 움직이자 혼자 파란불인 줄 알고 걸어가는 경험을 했다면 벌써 중증입니다.

운전 중에는 더욱 위험합니다. 최근 한국도로공사 충청사업본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충청권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512건의 교통사고 가운데 전방 주시태만으로 발생한 사고가 28%(146건)에 달했습니다. 졸음운전(20%)이나 과속(18.2%)보다 많은 수치입니다. 전방 주시태만이 모두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내비게이션에 탑재된 DMB와 더불어 최근 급속히 보급된 스마트폰이 차량 내부에서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주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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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폰7 광고 중. 그러나 메트로UI도 우리를 스크린에서 해방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비자들이 이동 중에 스마트폰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2011년 하반기 스마트폰 이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스마트폰 이용자의 58.3%가 “차량 이동 중에 스마트폰을 이용한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이 수치에는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 등 직접 운전을 하지 않는 경우도 포함돼 있겠지만, 이용자들이 이동 중에도 스마트폰을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설령 이용자들이 가급적 운전 중이나 걷는 중에 스마트폰 이용을 자제하려고 노력한다고 할 지라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메시지는 물론, 카카오톡 알림과 각종 푸시 알림 등 다양한 정보가 날아와 이용자의 주의를 분산시킬 것입니다. 핸즈 프리에 이어 아이즈 프리 혹은 No-스크린 기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런 면에서 애플이 직접 자동차 회사와 제휴해 시리를 자동차에 통합하고 시리를 호출하는 버튼을 자동차에 내장하기로 한 것은 참으로 발 빠른 행보입니다. 무엇보다 벤츠와 BMW, GM, 토요타 등 9개에 달하는 자동차 브랜드를 동시에 끌어들였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IT 기업들이 한두 개 자동차 회사와 제휴해 차량용 텔레매틱스나 인포테인먼트 기능을 개발해왔지만, 애플은 시리를 통해 단번에 이 시장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이용자를 붙잡아둬야 하는 스마트폰 제조사나 서비스 제공자로서도 이동 시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출퇴근이나 등하교 시간, 일과 중에 이동하는 시간을 모두 포함하면 우리가 하루 중에 이동하는데 소비하는 시간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2010년 국가정보전략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근로자가 하루 출퇴근에 소비하는 시간이 평균 152분이나 된다고 합니다.

과거에 이 시간은 주로 라디오의 차지였습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보급에 힘입어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와 오디오 팟캐스트 등이 이 시간을 파고 들고 있습니다. 시리를 필두로 한 다양한 음성 솔루션이 등장함에 따라 앞으로는 더 많은 서비스가 이동 중에도 우리를 편리하게 찾아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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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 연결 버튼을 기본 탑재한 자동차가 BMW 등 9개 사에서 출시될 예정이다

구글 안경은 시리의 경쟁자?

지난 4월 구글이 개발 중인 스마트 안경인 ‘프로젝트 글래스’가 공개돼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뜬금 없이 구글 안경 얘기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동 중에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 기기라는 측면에서 구글 안경은 시리 등 음성 어시스턴트 서비스와 경쟁하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플 시리나 구글 어시스턴트 등 음성 솔루션이 No-스크린이라는 관점에서 이동 중인 이용자를 공략한다면, 구글 안경은 한층 휴대성이 뛰어난 새로운 스크린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제공하겠다는 관점입니다.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는 2013년에 구글 안경을 상용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요, 단기적으로는 구글 안경처럼 새로운 스크린을 제공하는 기술보다는 시리와 같은 음성 어시스턴트 솔루션이 훨씬 확산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휴대폰은 모두가 휴대하는 기기이지만, 안경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안경을 벗으려고 목돈을 들여 라식 수술도 하는 마당에, 걸어가면서 지도를 보고 SNS를 이용하려고 소비자들이 다시 안경을 쓰게 될 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물론 저처럼 이미 안경을 쓰고 있고 이동 중에 정보에 대한 욕구가 큰 분들이라면 구글 안경은 환영할 만한 제품일 것입니다. 시각이 청각보다 훨씬 풍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면에서 장기적으로는 기존 안경 시장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음성 어시스턴트는 대중적인 기술로, 스마트 안경은 보완재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해 봅니다.

google_project_glasses_1_500한 미국 TV 쇼에서 구글 안경이 소개되고 있다

아이즈 프리, 모바일 접근성 개선의 돌파구

시리 등 음성 어시스턴트 기술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시각장애인용 접근성 향상 프로젝트는 항상 스크린을 염두에 두고 진행됐습니다. PC 모니터에서 마우스를 움직이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했을 때 해당하는 아이콘이나 메뉴가 무엇인지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방식입니다. iOS 보이스 오버나 안드로이드 토크백 기능이 대표적입니다. 시각장애인도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기술이지만, 일일이 화면을 터치해가며 원하는 기능과 메뉴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여전히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반면 최근 등장한 시리와 같은 음성 어시스턴트 기술은 굳이 이용자가 스마트폰 화면을 꾹꾹 눌러 읽어달라고 할 필요가 없이 시리를 불러내 말만 하면 알아서 실행하고 대답을 찾아줍니다. 음성 어시스턴트 기술이 발전하면 더 이상 보이스 오버와 같은 별도의 시각장애인용 접근성 기능이 필요 없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흡수 통합된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사실 ‘아이즈 프리’라는 용어는 애플이 원조가 아닙니다. 애널리스트들이 관련 기술에 대해 붙인 이름이죠. T. V. 라만 박사가 이끌고 있는 구글의 시각 장애인용 모바일 접근성 향상 프로젝트의 명칭도 ‘아이즈-프리’ 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최신 음성 어시스턴트 기능의 상당 부분은 사실 시각 장애인용 접근성 향상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아이즈 프리 기술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모두 이롭게 하는 고마운 기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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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모바일 접근성 기능은 화면을 읽어주는 기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음성 솔루션의 한계와 미래

아직 아이즈 프리 분야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은 기술입니다. 한 발 앞서 있다는 시리만 해도 아직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보다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더 많습니다. 특히 국내에서 시리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인식 기능을 더욱 보강하고, 위치정보와 맛집, 극장, 스포츠 DB 등 다양한 로컬 정보를 통합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영어에서 미국말과 호주말 등 다양한 억양을 구분해 알아듣는 것처럼 다양한 억양과 사투리도 더 배워야겠죠.

그렇지만 우리가 걸어 다니고 지하철을 타고 운전을 하는 한 아이즈 프리 혹은 No-스크린 기술은 점점 더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 것이 분명합니다. 이동 중에 많이 사용하는 서비스일수록 N스크린 못지 않게 No-스크린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시리나 S보이스가 오픈 API로 공개되기 전까지는, 많은 모바일 서비스 업체들도 빨리 애플 시리나 삼성 S보이스에 기본 탑재되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이 현명해 보입니다.

검색 서비스의 관점에서 시리를 보시는 분들은 벌써부터 시리가 기본 탑재된 서비스와 그렇지 않은 서비스를 차별하고 있다고 우려하시기도 하는데요, 일단은 빨리 아이즈 프리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동 중에 스마트폰을 사용하기가 무척 불편한 것이 현실이고, 특히 운전 중 스마트폰 사용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음성 어시스턴트가 보편화되면 그때 가서 검색 중립성 등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N스크린과 함께 No-스크린의 시대도 머지 않았습니다. 하루 빨리 시리의 한글 정식 버전이 출시되고, S보이스와 구글 어시스턴트 등 경쟁 기술과 함께 빠르게 발전해나가길 기대합니다.

아이즈 프리, 어서 빨리 내 시선을 작은 스크린에서 해방시켜줘!

잡스신의 부재와 애플교의 미래

- 임정욱 대표 강연과 ‘인사이드 애플’을 보고(이 글 내용의 상당수는 강연 내용과 ‘인사이드 애플’ 책에서 따온 것이지만 주장의 내용은 저자나 역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5월16일 저녁, 강남역 근처의 한 강연장에서 ‘인사이드 애플’의 역자인 임정욱 전 라이코스 대표의 강연이 열렸다.

‘인사이드 애플’은 포춘 선임기자인 애덤 라신스키가 애플 전•현직 임원과 관계자를 취재한 결과를 바탕으로, 애플의 내부 시스템과 조직 문화를 파해치고 어떻게 애플이 위대한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조망해보는 책이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공식 전기가 스티브 잡스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잡스 뿐만 아니라 애플이라는 조직과 그 문화를 집중 조명했기 때문에 또 다른 관점에서 애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임정욱 대표는 질의 응답을 포함해 한 시간 반 정도 이어진 이날 강연에서 300쪽에 달하는 책의 내용을 충실히 요약해 전달했다.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청중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이 자리를 메운 사람들의 관심사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 다수의 청중들은 사로잡고 있던 고민은 ‘스티브 잡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애플에서 일군 독특한 기업 문화를 어떻게 하면 내가 있는 회사에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들 중에 몇 명은 벤처기업을 이끄는 사장님이었고, 다른 분들은 애플의 경쟁자로 꼽히는 국내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분들인 듯 했다.(이날 강연은 삼성전자 사옥 바로 뒤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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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방식은 모방 가능한가?

이 질문은 저자인 애덤 라신스키가 ‘인사이드 애플’라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책 1장에서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애플이 이룬 성공은 정말 애플에게만 가능한 특별한 일일까? 아니면 애플은 전 세계 기업가들이 배워야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p.25)”

임정욱 대표는 청중들의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애플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을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친절히 답변했다. 예를 들어 제품 우선, 집중, 단순화, 전문화, 통합, 창의적 인재 우대, 타협하지 않는 정신 등이다.

저자인 라신스키도 9장 ‘애플 방식은 모방 가능한가’를 통해 애플의 장점을 받아들이려는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그 장단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소개된 사례를 살펴보면 이들이 애플 문화의 일부를 차용해 영감을 얻을 수 있을 지언정 애플의 문화 대부분을 흡수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9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스로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새로 태어난 애플의 경영과 운영상의 특징은 모든 비즈니스에 귀감이 된다. 그것은 또한 벤처기업가들을 위한 소중한 핸드북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플처럼 되고자 할 때 빠지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은 애플의 문화는 6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의 현명한 CEO이자 단 한 명의 천재 기업가가 35년간 쌓아올린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회사도 손쉽게 애플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p.270)

나는 임정욱 대표나 라신스키 기자가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세계 최고의 혁신 기업으로 부상한 애플에게서 무언가를 배워보려는 분들의 열정 어린 질문을 단칼에 베어버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애플의 한 두 가지 장점을 취해 자신의 회사에 접목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애플의 문화는 스티브 잡스 개인의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서로 면밀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애플의 방식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기업 문화를 모두 뒤엎으려는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애플은 대부분의 경영 이론에 전면으로 배치되는 유일무이한 사례다. 결정적으로 우리 혹은 우리의 보스는 절대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그가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은 아니다. 너무도 복잡하고 개성 넘치는 인물이며, 누구보다 독특한 인생 역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까다롭게 굴고 성질만 부린다고 애플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 사후에 추모 열기가 일면서 많은 사장님이나 부장님들이 잡스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재빨리 그의 서재에서 스티브 잡스 전기나 애플 관련 책을 찾아내 몰래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고 싶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애플조차도 제2의 스티브 잡스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

그런데 누구도 다시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없다면, 흔히 ‘잡스에 의한, 잡스를 위한, 잡스의 회사’처럼 비취지는 애플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애플은 과연 5년 후에도 지난 15년 동안 보여줬던 놀라운 혁신과 성장을 이어나가며 세계 최고 기업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날 강연에 참석한 청중들의 두 번째 관심사이자, 내가 임정욱 대표의 강연과 ‘인사이드 애플’을 통해 구하고자 했던 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저자 라신스키가 했던 것처럼 애플의 조직과 문화를 들여다보는 것이 최선이다.

애플은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인사이드 애플’을 읽다 보면 애플 조직 문화의 모순된 면이 드러난다. 흔히 경영학 이론에서는 직원들의 동기를 유발하고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직원들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자신이 전체 조직과 프로세스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 투명성을 유지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애플은 철저히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애플 직원들은 매우 한정된 책임과 권한만을 갖는다. 이러한 비밀주의는 자신이 맡은 일이 회사 전체의 전략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지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어떤 직원은 잡스가 “이 회의에서 뭔가 유출된다면 당사자를 해고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회사 고문 변호사들을 동원해 최대한 응징할 것”이라고 말하자 악몽을 꿀 정도 였다고 술회한다.

그 결과 애플 직원들이 맡고 있는 프로젝트들은 하나하나가 퍼즐 조각처럼 분리된다. 완성된 퍼즐의 모습은 조직의 최상위층만이 알 수 있다. 직원들에게 권한을 이양하는 대신 잡스 본인이 세세한 것 하나까지 직접 챙긴다. 애플 직원 대부분은 제품발표회에서 임원들이 선보이는 데모 제품을 보지 않고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경영 이론에서 가르치는 방법과 전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이다. 특히 나를 포함해 전체 프로세스와 내가 맡은 일 사이의 상관 관계와 나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고민하는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애플의 조직 문화가 무척 갑갑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애플에 있는 모든 이들은 밖으로 나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밖에 있는 모든 이들은 애플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애플이 동종 업계의 회사와 비해 큰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물론 스톡옵션을 통해 백만장자가 된 직원들도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애플은 동종 업계의 회사들과 비슷한 수준의 연봉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 직원들은 왜 때로는 휴일을 반납해가면서까지 애플에 충성을 다하는 것일까? (열심히 일하는 애플 내부의 문화는 최근 공개된 애플의 신입사원 환영 메시지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대답의 일부분은 애플 문화의 긍정적인 부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플 특유의 디자인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엔드-투-엔드 통합, 전략적으로 제한된 과제에 집중하고 나머지 아이디어에 No를 외칠 수 있는 문화, 스타트업과 같은 유연한 조직과 뛰어난 인재들과 같은 애플의 장점은 또 다른 뛰어난 인재를 불러모으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을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점이 애플 직원들에게 다른 어떤 보상보다도 더 자극이 되는 모양이다. 애플에서 마케팅 담당자로 일했던 프레데릭 밴 존슨은 “애플 직원들에게는 그런 회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그런 훌륭한 제품에 열정을 받친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바에 앉아 있으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90%가 당신 회사가 만든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멋진 경험이죠.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최근에 기사 작위를 받은 조나단 아이브도 한 인터뷰에서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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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표지 2010년 1월

잡스신의 부재와 애플교의 미래

그러나 이것만으로 애플의 마법을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애플 직원들을 실제로 움직이게 만들었던 동력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스티브 잡스 본인이다.

책에서 한 전직 애플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애플에는 잡스를 숭상하는 강력한 문화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있잖아, 스티브가 이것을 원해. 스티브가 저것을 원해.’ 일상적인 대화에서 ‘스티브’가 매우 자주 튀어나오고 그는 어떤 사람보다 큰 힘을 갖습니다.” 어떤 임원은 “일을 실천에 옮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메일 제목에 ‘Steve request’라고 쓰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임정욱 대표는 강연에서 “애플은 스티브 잡스를 정점으로 한 종교 집단과 같다”라고 설명했다. 저자 라신스키도 애플의 종교성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빙고. 종교성이야 말로 애플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인사이드 애플’ 이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애플의 종교성을 지적한 바 있다. 1986년 초 남성잡지 ‘에스콰이어’는 ‘넥스트’를 설립한 잡스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스티브 잡스의 재림(the Second Coming of Steve Jobs)’라는 제목을 달았다. 저널리스트 앨런 도이치먼도 2000년에 출간한 애플의 재탄생 과정을 다룬 책에 똑같은 제목을 붙였다. 2010년 아이패드가 발표된 뒤 ‘이코노미스트’는 머리 뒤에 금빛 후광이 비치는 예수의 모습을 한 스티브 잡스의 모습을 표지에 실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 뿐만 아니라 애플 내부에서도 왕이나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매주 월요일 열리는 회의를 통해 애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를 파악하고 있었고,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그는 존경과 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의 칭찬 한마디를 듣기 위해 모든 독설을 감내하는 직원들도 많았고, 어떤 직원들을 그와 마주치기를 두려워하기도 했다.

잡스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면서 아마 그 어떤 기업보다 애플 자신이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제 2의 스티브 잡스를 발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을 것이다. 저자도 실제로 스티브 잡스가 누가 다음 CEO가 돼야 하는가를 두고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이 고민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스티브 잡스와 애플 이사회가 차기 ‘교주’로 티모시 도널드 쿡을 선택한 것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또 다른 잡스를 발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가치를 그의 사후에도 애플 내부에 충실히 이식할 수 있는 관리자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잡스가 싫어할 만한 비유지만, 팀 쿡에게 남은 숙제들은 보면 마치 초기 기독교에서 베드로나 바오로가 했던 역할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팀 쿡이 2009년 1월 스티브 잡스가 병가를 떠난 뒤 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컨퍼런스 콜에서 한 발언 – 흔히 팀 쿡 독트린 으로 알려진 – 은 마치 애플교의 교리를 암송하는 듯 했다(인사이드 애플 p134 참조). 그는 자신이 애플교의 가장 훌륭한 신자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장식했다. 잡스가 떠나기 전에 만든 애플유니버시티도 애플교의 교리를 정리하고 설파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팀 쿡을 선택한 것은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으로 둔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싶다. 팀 쿡이 CEO가 된 이후 온갖 우려에도 불구하고 애플 주가는 최대 1400억 달러나 늘어났다. 아이폰4S와 새 아이패드는 공개 당시 일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장에서는 또 다시 사상 최대 판매량을 경신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모두 당초 월가의 예측치를 뛰어넘는 결과다.

만약 팀 쿡이 아닌 스티브 잡스와 유사한 성향의 인물(예를 들어 스콧 포스톨?)을 CEO에 앉혔다면 어땠을까? 혹은 외부에서 제 2의 존 스컬리 같은 인물이 영입됐다면 어땠을까? 결과론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팀 쿡 만큼 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부터 차기 CEO를 염두에 두고 영입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스티브 잡스가 14년 전에 팀 쿡을 데려온 것은 참 현명한 선택이었다. 제 아무리 팀 쿡이라도 외부에서 갓 영입됐다면 애플교의 차기 수장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잡스는 아마 존 스컬리를 영입했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건강이 악화되고 팀 쿡에게 조금씩 권한을 넘기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다만, 팀 쿡호가 지금 순항하고 있다고 할 지라도 이와 같은 좋은 시절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는 스티브 잡스 없는 애플이 빌 게이츠가 떠난 이후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티브 발머 치하의 MS가 망가진 원인 중 하나로 엔지니어보다 MBA 출신을 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면 스티브 잡스가 중용한 MBA 출신은 팀 쿡과 CFO인 피터 오펜하이머 정도였다. 잡스 시절 애플에서는 언제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진리였다.

그러나 팀 쿡 시대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라신스키가 5월24일 포춘에서 보도한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2011년까지 14년간 애플에서 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일했던 맥스 페일리의 발언이 눈에 띈다.

“요즘은 모든 중요한 미팅에서 항상 프로젝트 매니저와 글로벌 공급망 관리자들이 북적거린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있었을 때에는 엔지니어링 쪽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결정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프로덕트 매니저와 공급망 관리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죠.”

기사는 2년 전 애플 직원 가운데 링크드인 프로필에 MBA를 언급한 직원이 10%도 안됐던 반면, 지금은 절반이 넘는 직원이 MBA를 이수했거나 이수하고 있다는 내용도 전했다. 이것은 둘 중에 하나를 뜻한다. 애플에서 MBA 출신이 우대를 받기 시작했거나, 아니면 이들이 애플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라신스키 기자는 기사 말미에서 “더 이상 신은 필요 없고 인간적인 CEO가 필요하다”라며 팀 쿡이 가져온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나는 좀 께름칙하다)

물론 팀 쿡은 이미 성공의 정점에 이른 조직을 물려받았다는 면에서 베드로나 바오로보다는 훨씬 덜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오로의 역할보다 팀 쿡에게 주어진 과제가 한결 험난해 보이는 이유는, 그리스도는 재림을 약속했지만 잡스의 재림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97년 한 차례 재림했으며 우리에게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를 안기고 떠났다. 우리는 모두 그가 또 다시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플의 미래에 대해 저자 라신스키와 임정욱 대표는 “애플이 비상식일 정도로 훌륭한(insanely great) 회사로 남기는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문화를 통해 앞으로도 훌륭한 회사로 남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나는 애플의 미래에 큰 위기가 닥칠 가능성도 많다고 본다. 신의 재림을 보장할 수 없는 종교는 큰 위기가 닥치는 순간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다.

애플의 위기는 아마도 미래에 출시할 제품이 한 번 크게 실패하는 순간 닥쳐올 것이다. 애플의 단순한 제품 라인업은 훌륭한 제품이 끊임없이 나왔을 때 효율성의 극단을 자랑하지만, 한 번 실패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애플이 한 두 번 큰 실패를 맛본다해도 막대한 현금 자산이 회사 자체는 유지시켜 주겠지만, 주가와 인재, 그리고 팬보이는 썰물처럼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

특히 애플팬들은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통해 애플 제품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애플 제품이 업계 선두 수준의 품질로 출시된다고 할 지라도 센세이션한 충격을 주지 않는 한 실망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라신스키는 책에서 나머지 사람들의 기대도 항상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애플 마케팅에서 애플 추종자들이 하는 역할은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다.

잡스가 없어도 애플에서 누군가는 취향이나 소프트웨어 구조와 같은 문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아마 팀 쿡은 아닐 것이다. 과연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여전히 애플에는 조나단 아이브나 스콧 포스톨과 같은 뛰어난 사람들이 있지만, 키노트와 넘버스가 보여주는 격차를 보면 잡스가 없는 애플을 걱정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프리젠테이션 도구로 꼽는 ‘키노트’는 사실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후 본인이 프리젠테이션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키노트의 형제뻘인 스프레드시트 ‘넘버스’는 키노트처럼 최고로 꼽히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잡스가 스프레드시트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애플의 제품이 항상 넘버스 같은 수준으로 나온다면 나는 더 이상 애플 제품을 사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애플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내놓을 제품에 달려있다. 아이폰4S와 새 아이패드가 순항하고 있지만,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들 제품에서 혁신적인 새로운 면모는 없었다. 과거에 있었던 기술과 인수한 기술을 적용했을 뿐이다. 과연 잡스가 없는 애플에서 앞으로 선보일(지 모르는) iTV나 iCar와 같은 새로운 제품군이 과거 아이팟이나 아이폰, 아이패드가 그랬던 것처럼 혁신적일 수 있을까?

꼭 그러하기를 바란다. 나 역시 앞으로도 계속 애플교의 신자이고 싶지만 나이롱 신자라서 그런지, 신이 부재하는 상황에 새 교주가 주기적으로 기적이라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계속 신자이기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 일단은 경건한 마음으로 ‘인사이드 애플’을 다시 읽으며 6월에 열릴 신제품 예배에 기대를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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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좋은 기사를 보면 “이 기사 참 객관적이네”라고 말한다. 마음에 안드는 기사가 있으면 “이 기자 참 주관적이네” 하면서 욕하기도 한다. 그만큼 객관성이라는 요소가 기사의 가치와 신뢰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사가 꼭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객관성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따져보면, 이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객관성은 개인의 주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성질을 통칭한다. 이 말은 곧 이 객관성을 판단하는 개인의 주관으로는 대상이 객관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주관을 넘어서 객관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하는 물음 자체가 유구한 서양 철학사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누구나 자신만의 주관적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현상을 이해한다. 기사도 사람이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쓴 기사를 읽는 것도 사람이다. 그런데 대체 기사의 객관성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취재 대상이 하는 말만 그대로 갖다쓰면 객관적인 기사가 되는 것일까? ‘받아쓰기’ 기사가 될 뿐이다. 이쪽과 저쪽의 의견을 반반씩 분량을 맞추면 객관적인 기사가 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분량의 공평함을 핑계로 철저히 편파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사례를 수도 없이 경험했다. 그렇다면 기자의 모든 의견을 바닥까지 제거하고 나면 객관적인 기사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애초에 가능키나 한 것일까?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김상범 블로터닷넷 대표에게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객관적인 기사는 없다”였다. 처음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신방과 출신이거나 기자 지망생이 아니었던 탓에 언론학에 대해 쥐뿔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기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덕목은 마치 “어른은 공경해야 한다”는 말 만큼이나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선배들의 가르침은 명료했다.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인 기사가 판치는 세상이다. 그럴 바에는 네가 스스로 쓰고 싶은 말을 써라.” 무서운 말이다. 한 문장 쓰려고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는 신입 기자한테 당시 경력 10년차가 넘었던 블로터닷넷 선배들은 “나처럼 써봐”라고 말하고 있었다. ABC를 배우는 학생한테 셰익스피어를 던져준 셈이다.

처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배들의 기사 형식을 흉내내는 것이 전부였다. 형식을 따왔다고 내용과 깊이까지 따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름대로 분석과 비판을 해본다고 하다가 헛발질을 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기자가 사족을 달았네.” 짧지만 강력한 비판이다. 참 아팠다.

실제로 반년 쯤 열심히 기사를 쓰다가 더 이상 글이 안써지는 증상이 생기기도 했다. 김상범 대표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저 기사 못쓰겠습니다. 문장이 안써집니다. 열심히 노력해보겠지만 한 일주일만 이해해주세요.”

나름대로 고충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내 기사를 쓸 수 있게 됐다. 하나 둘 내 기사와 의견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관적인 기사를 쓰라”는 말의 의미도 어렴풋하게 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내 기사를 쓸 수 있게 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철저히 주관적으로 평가한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참 객관적인 기사네요.”

이 제품은 좋다, 나쁘다, 이 제도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고쳐야 한다, 마구 주관을 쏟아낸 기사에 독자들은 ‘객관적’이라고 했다. 내가 더 내 뜻대로 주관적으로 기사를 쓰고 ‘이 기사는 진짜 내 기사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기사일수록 ‘객관적’이라는 댓글은 더 많이 달렸다. 기자가 가장 주관적으로 쓴 기사를 독자는 객관적인 기사라고 하니 이야말로 주관과 객관이 교차되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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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lickr.com, arlingtonva님이 일부 권리를 보유함 CC BY-SA 2.0>

‘장자’를 보면 ‘천균(天均)’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늘 ‘천’, 고를 ‘균’이다. ‘천균’이라는 말은 중심 잡히고 균형 있는 상황을 뜻하는 것이며, 장자가 강조하고자 했던 소통의 핵심 키워드로 읽힌다.

균(均)은 또한 도자기를 만들 때 쓰는 물레를 뜻한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에서 천균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물레는 흙덩어리와의 소통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려면, 우리는 제일 먼저 물레의 중심에 흙덩어리를 얹어야만 한다. 만약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흙덩어리를 얹었을 경우, 그것은 물레가 회전하자마자 바로 땅바닥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물레의 중심은 항상 비워져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흙덩어리가 물레의 중심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마음을 물레에 비유하며 마음을 비워야한다고 이야기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구절이다. 천균의 비유가 더욱 강력한 것은 물레가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회전하는 역동적인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옳고 그름, 객관과 주관을 시소의 양 끝처럼 일직선에 놓고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장자는 옳고 그름이 회전하듯 역동적인 상태에 있으며, 소통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단 중심을 비우고 그 중심을 관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사의 개관과 주관의 역설을 풀 수 있는 해답도 장자의 천균에서 찾을 수 있다. 장자 식으로 설명하자면 좋은 기사란 객관과 주관이 맞물려 도는 물레에서 중심을 관통하는 기사다. 의견이 없는 기사가 아니라 중심을 비운, 즉 의도가 없는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회전하는 다트판에서 정확히 한 가운데를 맞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가운데를 맞히기 위해서는 일단 다트를 던져야 한다. 때로는 빗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눈 질끈 감고 ‘주관적인 기자’라고 욕 한 번 먹으면 된다. 심기일전하고 정신을 집중해 다음 다트를 던지면 된다. 던지지 않으면 중심을 맞힐 수도 없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드디어 다트판의 한 가운데를 맞히는 날도 올 것이다. 주관과 객관을 넘어 기자와 독자의 생각이 소통하는 순간이다. 만약 이것을 두고 독자들이 ‘객관적’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주관과 객관은 시소의 양 끝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블로터닷넷 선배들이 그렇게 주관적인 기사를 쓰라고 강조한 것도 후배가 언젠가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와 드는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자식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사자와 같은 스승을 만난 것은 참 행운이었다.

너도 나도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다. 그 말은 곧 불통이 판을 치는 시대라는 뜻일 것이다. 장자의 ‘천균’이 주는 교훈도 비단 기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을 상대하는 정치인, 소비자를 상대하는 마케터, 미녀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남자, 손님을 상대하는 치킨집 사장님, 누구든 소통을 원한다면 천균의 지혜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도 말로, 또 글로 세상을 향해 다트를 던진다. 여전히 마음은 복잡하고 손이 떨린다. 빗나가기 일쑤지만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불스 아이(Bull’s eye). 가끔 명중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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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lickr.com, ogimogi님이 일부 권리를 보유함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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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등이와 삼엽충의 심리적 기원

‘앱등이’와 ‘삼엽충’이 벌이는 설전은 IT 업계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시다시피 ‘앱등이’라 함은 일부 소비자들이 애플과 아이폰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을 비하하며 부르는 말입니다. 반대로 ‘앱등이’들은 이에 못지 않은 삼성빠와 갤럭시빠를 ‘삼엽충’이라고 비꼬며 응수합니다.

다른 IT 제품에 대해서도 팬층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지만, 앱등이-삼엽충 전쟁처럼 적극적이고 과격한 설전으로 번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휴대폰 담당 기자들은 종종 다른 기자들에게 기사에 댓글이 많이 달린다며 부러움의 대상의 되기도 하는데요, 그 중에 많은 경우는 앱등이와 삼엽충의 활약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폰4와 갤럭시S가 한참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던 당시 앱등이와 삼엽충의 과도한 논쟁을 비판하는 글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습니다. 과열된 앱등이와 삼엽충의 싸움이 제품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을 사라지게 하고 무조건적인 깎아내리기로 다른 소비자들의 선택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앱등이-삽엽충 이분법이 밴드웨건 효과를 창출해 애플과 삼성이 아닌 다른 회사가 경쟁에서 더욱 뒤쳐지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며, 이들 기업이 알바를 고용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적해봐야 앱등이와 삼엽충의 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앱등이나 삼엽충도 출발은 한 명의 소비자일 것입니다. 앱등이•삼엽충 전쟁에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입을 닫도록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과연 어떻게 소비자가 자신이 구매한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이 정도로 애착과 열의를 가지게 되느냐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친 제품 사랑이 왜 유독 휴대폰 산업에서 도드라지는가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누구나 조금씩 자신이 선택한 제품에 대해 애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과연 앱등이•삼엽충과 우리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저와 같은 모바일 담당 기자는 아이폰과 갤럭시를 돌려 쓰며 갤럭시 기사를 쓴 날은 댓글을 통해 삼엽충으로 변신하고 아이폰 기사를 쓴 날은 앱등이가 되니, 앱등이와 삼엽충을 넘나드는 박쥐의 운명을 타고 난 셈입니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를 쓴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다니엘 길버트는 2004년 TED 강의에서 행복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요약해서 전해줍니다. 강의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모네의 그림 6점을 놓고 선호도를 매기라고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1번부터 6번까지 번호를 매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합니다. “3번과 4번 그림이 남아있는데 실험에 참여했으니 한 점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그림을 가지실래요?” 다수의 사람들이 선호도가 높은 3번을 골랐습니다.

그로부터 15분 후, 같은 참가자들에게 다시 그림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갖기로 선택한 3번 그림이 선호도 2번으로 올라갔고, 포기한 4번 그림은 선호도 5번으로 내려갔습니다. ‘내 것’으로 삼기로 결정을 하자 불과 15분 만에 그림에 대한 취향이 변한 것입니다. “내 것은 생각보다 좋아, 나머지는 형편없어”의 마법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앱등이와 삼엽충의 심리적인 기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특성 말입니다. 길버트 교수는 이를 ‘심리적인 면역 시스템’이자 ‘만들어진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자기합리화의 과정은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더욱 강하게 발휘됩니다. 길버트 교수는 학생들과 함께 또 다른 실험을 했습니다. 사진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사진을 찍게 한 후 그 중에 가장 선호하는 2장의 사진을 고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 장 중에 한 장은 본인이 갖고 한 장은 과제로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택의 순간입니다.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뉘어졌습니다. 한 그룹에는 과제로 제출할 사진이 발송될 때까지 4일의 여유가 있으니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사진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결정을 번복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다른 그룹에게는 과제로 제출된 사진을 곧바로 영국으로 발송해야 한다며 교환의 기회를 원천 봉쇄했습니다.

그러자 흥미로운 결과가 벌어졌습니다. 선택한 직후에는 두 그룹이 사진에 대한 만족도에서 큰 차이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환할 선택권이 없는 그룹은 만족도가 점점 올라간 반면, 사진을 바꿀까를 고민할 수 있었던 그룹은 점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교환권이 없다’는 사실이 심리적인 면역 시스템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나은 것입니다.

길버트 교수는 이러한 우리의 심리적인 특성을 연애와 결혼에 빗대 설명합니다. 연애할 때 애인이 수시로 손가락으로 코를 후빈다면 헤어질 수도 있겠지만, 결혼한 다음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우리는 “그래도 마음씨는 고운 사람이니까…”라며 심리적인 면역 시스템을 가동시키게 될 것입니다.

휴대폰을 구입하는 것도 결혼과 비슷합니다. 휴대폰은 어떤 IT 기기보다도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제품입니다. 게다가 2년 약정이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늘 산 이 스마트폰은 좋던 싫던 나와 함께 2년을 함께 할 것입니다. 아이폰이던 갤럭시던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내 것은 생각보다 좋아. 나머지는 형편없어.”의 마법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할부금과 위약금(어쩌면 위자료?)을 안내받는 순간 우리는 2년 동안 열심히 심리적인 면역 시스템을 가동시키게 됩니다.

물론 항상 자신이 구입한 기기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제품, 이전에 사용하던 제품보다 형편없는 제품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옴니아 시리즈를 꼽을 수 있겠군요. 옴니아는 많은 분들에게 그 전에 쓰던 폴더폰보다도 사랑에 빠지기 힘든 제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최근 출시되는 스마트폰은 그 전에 쓰던 피처폰에 비해 사랑에 빠질 만한 구석이 많아졌습니다. 그 전에는 휴대폰으로 엄두도 못냈던 일을 척척 해내니까요. 내 선택이고 예전 제품보다 좋으니 사랑에 빠지기 충분합니다. 아이폰과 갤럭시에 대한 앱등이와 삼엽충의 사랑도 그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휴대폰에 대한 사랑이 배우자에 대한 합리화보다 위험한 이유는 우리가 휴대폰에 대해서는 결혼 전에 충분히 연애를 해볼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 기사나 대리점 직원의 설명에만 의존해, 맞선 보고 곧바로 결혼식 날짜를 잡듯 휴대폰을 구입하게 됩니다. 남은 것은 오늘 처음 만난 휴대폰과 결혼해 2년 동안 열심히 합리화를 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모두 소비자의 탓은 아니겠죠. 우리나라의 수박 겉핥기식 IT 리뷰 기사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애플이 애플 스토어를 결혼식장(구매 장소)가 아닌 연애 장소(체험 및 교육 공간)로 디자인한 이후 많은 IT 매장이 체험형 공간으로 변화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인간 심리의 면역 시스템은 우리가 인생에서 위기와 실패에 봉착했을 때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고마운 기작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과 현실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과해졌을 때 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닌 것이 되기 십상입니다. 적어도 돈 한푼 받지 않고(심지어 내 돈을 내고) 귀중한 나의 시간을 낭비하며 애플이나 삼성 마케터로 일해줄 필요는 없겠죠.

길버트 교수는 다음과 같은 아담 스미스의 말을 인용하며 강연을 마무리합니다.

The great sourse of both the misery and disorders of human life, seems to arise from over-rating the difference between one permanent situation and another… Some of those situations may, no doubt, deserve to be preferred to others; but none of them can deserve to be pursued with that passionate ardour which drives us to violate thr rules either of prudence or of justice; or to corrupt the future tranquility of our minds, either by shame from the remembrance of our own folly, or by remorse from the horror of our own injustice.

이 말을 우리의 현실에 비춰 아래와 같이 의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 비참하고 무질서해지는 것은 선택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제품은 다른 것보다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제품도 우리가 지나친 열정으로 신중함을 잃거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자신을 뉘우치면서 얻을 수 있는 내면의 평안함을 방해하는 것을 감내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미국인 모리스 빅햄(Moreese Bickham)은 저지르지 않은 범죄 혐의로 루지애나 주 교도소에 37년간 복역해야 했습니다. DNA 검사를 통해 무죄로 밝혀진 것이 78세 때였습니다. 그는 출소 후 “나는 한순간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광스러운(glorious)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고 합니다. 경이적인 합리화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 그는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처럼 살고 싶지 않군요.

제품을 제품으로 바라보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합리화의 기작을 적당히 조절하는 것은 사실 같은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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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위한 변명 – [도구는 도구다]를 연재하면서

게으른 내가 블로그를 새로 만들자마자 ‘도구가 나를 위해 일하게 하라’는 주제로 연재를 해보겠다고 무리수를 뒀다. 그것은 아마도 최근 부각된 ‘스마트폰이 우리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주범이고, SNS가 우리에게 정보의 과잉과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담론이 내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 빅뱅의 시대에 스마트 기기와 소셜 미디어의 부작용을 짚고 넘어가는 것도 충분히 의미는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주장에 내가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아마 고등학교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

나는 90년대 후반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휴대폰이 대중화되는 시점이었다. 통신사들은 학생용 요금제를 출시하며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녀와 연락이 어려웠던 학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휴대폰을 사주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교생이 학교에 단 두 대 있는 공중전화로 부모님과 안부를 주고 받아야 했다. 쉬는 시간이면 공중전화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는 풍경이 연출됐다.

학생들 사이에 휴대폰이 조금씩 보급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따끔씩 수업 중에 벨소리가 울렸고 그때마다 수업 분위기가 흐려졌다. 자연스럽게(?) 학내 규정에 두발과 복장 단속에 이어 휴대폰 단속이 추가됐다.

문제는 선생님들이 수업 중에 이용하다가 걸린 학생의 휴대폰 뿐만 아니라, 기숙사 방을 구석구석 뒤져서 얌전히 보관하고 있던 휴대폰까지 압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휴대폰은 점점 음지로 숨어들었지만, 반대로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수업 중에 전화벨이 울리면 수업을 멈추고 당당하게 전화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휴대폰 에티켓이 자리잡지 않은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에티켓을 지켜서 휴대폰을 이용하는 것조차 금지된 반면 선생님들은 수업 중에도 거리낌 없이 전화를 받는 모순된 상황은 혈기왕성한 사춘기 소년의 뚜껑을 열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래서 18살의 나는 치기어린 과격한 방법(?)으로 학내에서 휴대폰 이용 자유화를 주장했고(여기에 두발 자유화까지 물고 늘어졌다), 하마터면 학교를 떠나게 될 뻔했다.

다행히 여러 선생님들이 나를 제자로 품어주신 덕분에 사태는 잘 마무리됐다. 한편으론 교사의 권위에 도전한 대가로 일부 선생님들을 교사가 아닌 인간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마음의 상처와 교훈도 많이 었었다. 생전 처음 자식이 다니는 학교를 들락거리게 된 아버지와 사춘기 아들이 많은 대화를 하면서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게 된 것은 보너스였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깊게 각인된다. 당시 사춘기 고등학생의 문제 의식을 이제와서 30대의 마음으로 차분히 옮겨보면, 앞으로 휴대폰이 점점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 것이 뻔한데 교육 현장에서조차 올바른 에티켓을 가르치키는 커녕 무조건 쓰지 말라고 강제하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10년이 훌쩍 넘게 지나 스마트폰과 SNS의 부작용을 집중 보도하는 일부 미디어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과도한 알러지를 일으키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한 남자가  스마트폰으로 비발디 <사계>를 들으며 뉴욕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출처 : flickr.com 저작권 :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Ed Yourdon님이 일부 권리를 보유함)

“스마트폰과 SNS가 우리의 인간됨을 갉아먹고 있으니 인간은 기계에서 해방될 지어다”라고 외치는 것은 ‘쿨’해 보인다. 이 주제는 흔히 말하는 ‘먹히는’ 기사고, 그 동안 기사와 광고를 통해 ‘스마트폰 사라’, ‘SNS 써봐라’하고 부추겼던 그들이 마치 중립적인 입장인 양 균형을 취하게 해주는 좋은 방편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스마트폰 사라’로 시작해서 ‘스마트폰에서 해방되라’로 끝맺는 동안, 어떻게 해야 스마트폰과 SNS를 현명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얼마나 주목을 했던가.

나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화의 회복은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는 데서 출발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대화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어서 스마트폰을 집어드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것은 대화의 원인이 아니라 관심의 결과다.

SNS도 마찬가지다. SNS의 속성이 우리에게 피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필요성을 못느끼면서도 유행이라니까 목적 의식 없이 의무감에 따라하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단지 이 도구가 나에게 필요한지 아닌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하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지만 고민하면 된다. 진짜 ‘해방’은 도구를 집어던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도구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굳이 문제의 원인을 따지자면 일개 도구에 불과한 스마트폰이나 SNS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스마트폰을 사도록 부추기는 통신사의 마케팅 행태나 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처럼 부추기는 미디어, 그리고 도구를 도구로 보지 못하고 유행 따라 휘둘리는 당신에게 있다.

만일 여러분이 1년간 인터넷을 끊겠다고 선언한 더버지의 폴 밀러 처럼 과감히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SNS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내가 왜 이런 도구를 활용해야 하는지 목적을 뚜렷히 하자. 남들이 쓰는 방식을 의무감에 따라하지 말고 나만의 방법을 찾아 도구가 나를 위해 일하게 하자.